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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May 19. 2020

하나의 인연은 어떻게 종말을 맞게 되나

- 인연과 시절의 연관관계에 대해 

한때 나는 기이한 연을 이어갔다. 그녀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라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 닥치면, 그녀는 남편과 매우 끈끈한 연대감으로 타인을 공격한다. 그 공격은 단타로 끝나지 않는다. 연이어 날리는 펀치에 상대는 속수무책을 쓰러진다. 따발총을 양쪽에 쏘아대듯 부부 둘이서 동시다발적으로 얘기한다. 



예를 들어, 나는 그녀의 남편 담당이다. 그녀의 남편은 본인의 취향에 대해 끊임없이 애기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묘한 표정을 지을 뿐. 나의 남편은 내 친구에게 대화의 주제를 허락 받고 있다. 그녀가 괜찮을 소재꺼리니 어서 얘기해보렴이라는 태도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내가 들어주는 이유는, 그건 소재가 새로워 나에게 가치가 있는 얘기"라는, 말의 허가증이라도 받아야 대화가 가능하다. 



그날 남편은 술에 조금씩 정신을 놓고 있었다. 알코올에 완전하게 자신을 잠식시키진 않았지만, 목까지 찬, 말 그대로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그녀의 허락에 오토바이를 끌고 나오긴 했는데 음주 상태라 몽롱해서 얘기가 두서없이 흐른다. 그러면 그녀의 남편이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비틀대다 사고가 날뻔한다. 그러면 다시 그녀의 시간이다. 그녀는 이를 빌미로 은근 슬쩍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남편이 대화를 이끌기 전, 무려 3시간 이상 그녀의 말로 말잔치가 이미 거하게 치러졌었다) 그러다 다시 나의 남편에게 어서 얘기해보라고 재촉한다. 저것은 쌍방향의 대화가 아니라 마치 스승이 제자에게 지시하는 태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도 저런 태도가 있었지라며 나는 기억의 회로를 되돌렸다.



언젠가 아이에게 화려한 파티복을 입힌 적이 있었다. 언니가 사다준 파티복은 우리나라에는 들어오지 않은 미국 브랜드였다. 아이에게 그 옷을 입히는 순간 친구는 내게 말했다.


“어서 사진 찍어 뭐해? 찍으라니까”


순간 머릿속이 암전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더 놀라운 건, 갑작스러운 지시에 나는 말 잘 듣는 양처럼 사진을 찍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녀의 얘기에 순응해야한다. 그녀의 단호한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말한다. 부부 관계에 관해서는 내가 몇 년째 책을 읽고 있어 잘 안다고. 그러니 남편과의 싸움에 감정을 쌓아두지 말고 어떤 식으로든 상대가 알 수 있게 해야한다고.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당시 그녀와 나는 결혼 5년차. k는 10년 차가 넘어섰다. 그녀가 보기엔 k는 행복한 부부 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조언을 이어갔다. 하지만 대화를 잘 풀리지 않았다. k가 대부분 얘기를 듣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싸우면 나는 메일로 모든 걸 풀어. 남편은 처음엔 별 반응이 없다가

 나의 메일을 통해 내 심정을 조금씩 이해해주고 있어”

“.....”

“말하지 않으면 몰라. 얘기를 해. 너의 마음을”

“....”


나는 점점 그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 너는 남편에게 쌓인 감정이 너무 많아 이대로 가다간 위태로우니, 지금부터 관계 개선을 위해 너의 마음을 표현해야한다라는 요지였다. 하지만 상대방은 반응이 없다. 반응이 없다는 건 공감대 형성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탁상행정도 아니고 탁상 상담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담 효과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 확신을 갖지 않고 있다. 상담을 통해 인간이 개과천선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행동 수정이 있어야하는데 k는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마치 상담가처럼 행동하고, 수정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하지만 k는 지난 10년 간의 결혼 생활을 불행의 늪으로만 보진 않고 있다. 괜찮다라고만 간단하게 응수한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 기저에는 마치 친구에게 너는 불행해라고 각인시켜주고 있다. 하지만 k는 불행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쯤되니 마치 그녀는 k가 불행하길 바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밤새 집요하게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대화는 분산됐고, 별다른 소득 없이 우리는 다음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그녀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특별한 주제는 없었다. 나는 귀만 열고, 뇌는 닫아뒀다. 엄마들이 다른 엄마들과 친해지는 계기는 공감대이다. 독박 육아가 힘들다는 공감,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지에 대한 불안감에서 오는 공감 등이다. 하지만 그녀와 육아에 있어서는 절대 공감대를 얻긴 힘들었다. 나는 걱정이 많은 스타일이라 육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다. 그녀는 남편이 주로 육아를 하고, 그녀는 경제적인 면을 담당하고 있다. 서로 처한 입장이 다른 것이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의 아이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없다고 한다. 자기는 밖에서 일해도 들어오면 최선을 다해 아이와 놀아준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은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많은 아이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그런 얘기를 듣다보면 ‘아 그래?“라는 말고는 어떤 말로 응수하기 어렵다. 자신은 굉장히 자존감이 낮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한 번도 자존감이 낮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자식에 있어서는 굉장히 자신만만했다. 


“애 하나 보는데 왜 이렇게 힘드냐”

라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한 마디 던진다.


“난 한 번도 우리 애 때문에 힘든 적이 없어. 다 잘하니까. 다들 우리 애를 좋아하니까”

“...”


그녀와 얘기할수록 속 좁게 삐치는 나를 보는 게 불편했다. 나는 항상 나의 종지 같은 그릇이 단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정도로 이해하지 못하고, 불편해하는 내가 한심해보였다. 나는 항상 나를 비난하는 게 익숙하다. 왜 나는 너를 보면, 분개하는가, 그래서 왜 나는 항상 너와 만나고 나면 화가 나는가. 나는 괜찮은 어른이 되려면, 아직 많이 부족하다라고 자책했다. 그리고 서서히 내 인생에서 그녀는 거둬내야겠다고 결심한다.


밥을 먹어도 먹어도 속이 허한건 위의 크기나 허기의 문제가 아니라 뇌가 문제였던 것이다. 나의 인생에서 일방적인 그녀를 제외하고 싶어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아니면 그녀는 또 다른 누군가를 찾을 것이다. 대화 속에 나의 불행 스토리도 하나 생성됐을 것이다. 나의 불행이 그들의 도마 위에서 새롭게 조리된다는 상상. 내가 모르는 타인들에게 나의 일대기가 제공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어찌됐든 나의 요리는 어떤 맛일까? LA갈비마냥 질기고 질긴만큼, 곱씹을게 많아 오래도록 도마 위를 차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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