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론적으로 소는 죄가 없다
새벽배송로 주문한 한우가, 한우가 아니었음을 알게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독박 육아 7일째가 넘어서자 애 둘 데리고 장 보러 나가는 것도 일이라서 새벽배송으로 주문했다. 사실 식료품을 새벽배송으로 주문하는 걸 꺼려 한다. 박스 하나에 같이 동반되는 엄청난 쓰레기양을 볼 때마다 내 몸이 좀 더 움직이고, 내 주머니에서 조금 더 돈이 나가더라고도 나는 그편을 선택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먹을 건 점점 떨어지고, 첫째는 한 번 집에 들어선 순간, 집돌이 변신한다. 하여, 새벽배송으로 한우를 주문했다. 등심으로 주문한 한우는 예상대로 다음날 새벽, 집 문 앞에 배달됐다.
저녁 때 고기를 꺼내 구이를 해주는데 뭔가 심상치 않다. 첫째에게 자연드림 한우만 먹인 탓에 근 몇 년간 나는 고기의 질과 맛에 대해 알아버렸다. 마트나 동네 정육점 한우에 비해 자연드림 한우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고기는 엄청난 냄새가 났다. 굽는 동시에 평소와는 다른 냄새가 났다. 한우 특유의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비릿하면서도 역거울 정도였고, 어쩌면 사료로 점철된 생물의 최후가 불타는 순간 나는 냄새 같았다. 나의 상상을 자극하게 만든 그 고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쩜 한우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한 점 먹어보니 평소 잘라주던 대로 주면, 아이들은 못 먹겠다 싶었다. 일단 미국산인가 의심해보았다. 냄새가 한우보다 많이 나고, 조금 더 질긴 느낌이다. 네이버 찾아보면, 한우가 더 질기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나름 고소함은 있었다. 혹시 육우일까? 내가 한우라 알고 먹었던 많은 소들이 알고 보면 육우일 가능성이 높다던, 정육점 아저씨 말이 생각났다. 육우나 미국산을 의식해서 먹은 적이 없다. 나에게는 맛을 감별할 수 있는 비교 대상에 대한 경험이 없다. 호주산일까 의심도 해본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 전에 호주산을 샀다가 냄새나고 질긴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있으니. 냄새가 많이 나는 것으로 보다 호주산을 의심했다가 흔해 빠진 미국산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가 맛이 아주 많이 뒤처지는 건 아니니 육우가 아닐까 의심했다. 결국 절반만 구워 아이들을 주고, 남은 절반은 아직 냉장고에 있으나 저 고기를 다시 아이들에게 주진 않을 것 같다.
이리 구워도, 저리 구워도 내가 산 소는 한우가 아님을 확신한다. 이놈의 정체, 출신 성분을 나는 구분할 수 없다. 이건 고기 전문가의 영역이다. 문제는 앞으로 내가 새벽배송에서 한우라는 타이틀로 팔리는 고기들을 다시는 살 수 없을 거라는 것과 자연드림 온라인몰을 이용하자로 결론을 내렸다. 고기와 과일, 채소는 되도록 마트를 이용하자가 나의 신조를 다시 한번 굳건히 세워본다.
어제는 동네 마트에 과일을 사러 아이들과 함께 갔다. 정신없는 와중에 계산대에 선 순간, 한 아줌마의 중얼대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날 마트에서는 대추방울토마토를 3팩에 9,900원에 팔았다.
"왜 이렇게 산 거야? 맛이 없는 거 아니야?"
아줌마는 마음의 소리로 그치지 않고, 계산대에 직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이거 먹어봤어요? 맛있어요? 왜 싸게 팔아요? 맛이 없어서 싸게 파는 거 아니에요"
바쁜 와중에 대답해 주는 직원.
"많이 들어와서 싸게 파는 거예요"
누구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주부의 입장에서 물건이 갑자기 싸게 판다! 이럴 경우, 의심하게 된다. 왜 싸게 파는 걸까? 어떤 결함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어린이 놀이용 찰흙을 살 때도 성분을 의심하고, 화학성분이 들어간 장난감도 의심의 대상이고(아예 사주지 않음), 아이들 놀이용 비눗방울도 성분이 의심돼 잘 사주지 않는다. (실제로 문제가 된 성분이 발견된 비눗방울 기사도 있었음)
점점 더 세상만사 다 의심하게 된다. 의심병에 걸릴 정도도 내 주변에 일어나는 시각적인 현상뿐 아니라 사람의 의중까지도 의심한다. 저 사람의 말과 행동은 과연 진실의 지분이 과연 몇 %나 있을까?라고 마음속으로 거리두리를 한다. 사람들의 친절을 의심한지는 꽤 오래됐다. 불편한 진실이다.
사실 나는 병원의 의사도 의심한다. 이 동네로 이사 오면서 전문의 타이틀을 달고, 영업 중인 의사들은 의술보다는 상술에 가까운 진료를 하고 있다. 기침 좀 한다고 태어난 지 몇 개월 안되는 아이에게 바로 기침 패치를 처방해 준다. 그것도 이미 무한히 많은 양의 약을 쥐여주고도 말이다. 6개월 아기에게 가루약으로 처방한 그 의사의 실력도 의심한다. 아이들은 약을 먹기 힘들어하기 때문에 되도록 물약을 준다. 대단한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가루약 처방을 한 그 의사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물에 타서 먹으면 된다지만, 그렇다도 쓴맛이 단 맛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사례는 작은 예에 불과하다. 한창 일할 때 허리 통증과 함께 다리 바깥 라인 쪽으로 통증이 계속 있었다. 회사 근처 병원에 가니 나보고 디스크라고 한다.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고 협박을 한다. 나는 바로 병원코디네이터를 만났다. 수술 날짜를 당장 잡으라는데 어쩌지라는 고민이 들었다. 그때 남친(현, 남편)에게 전화를 거니 당장 나오라고 노발대발했다. 나는 다른 병원으로 갔고, 그곳에서 도수치료를 10회 정도 받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장애 없이 잘 살고 있다. 이러니 의심을 병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사를 와도 아이들이 경증에서 중증으로 가는 중간 단계로 판단되면, 몇 십 킬로가 떨어져 있어도 시간을 내서 전에 살던, 믿을 수 있는 병원에 간다.
게다가 현재 코로나 정국이다. 길 가다 만난 사람을 의심한다. 전에는 50~60대 여성을 많이 의심했었다. 혹시 신천지 교인이 아닐까? 혹시 열혈 교인이 아닐까? 그러다 최근엔 20대 남성을 의심한다. 길 가다가 마주치는 20대 남성을 보면, 피해 가고 싶다. 멀찌감치 떨어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어제 아이와 버거킹에 갔다가 거의 텅 빈 매장에 젊은 남성이 등장했다. 그가 우리 뒷자리에 자리를 잡은 게 내심 불편했다. 물론 전망 좋은 창가 자리임을 인정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인식이 없는 그 남자와 멀어지고 싶었다. 게다가 20대로 보이는 남성이 혹시 이태원에 갔었다면 어쩌나라는 생각에 불편한 마음을 안고 있다 다 먹자마자 자리를 떴다.
몇 년 전, 길 가다 만나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회라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앞으로도 상대방의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우리는 의심하게 될 것이다. 저 사람과 몇 미터 거리를 적정한지 마음의 거리를 재게 될 것 같다. 언커넥트 사회가 코로나로 인해 앞당겨졌다. 불안을 탑재한 의심보다는 아예 마주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하는 것이 더 안전한 사회가 돼버렸다. 결국 현재의 재택근무도, 화상회의도, 온라인 강좌도 안심할 수 없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우리는 점점 더 의심할 꺼리들이 더 생길 것이고, 누구도 그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피로사회라는 책이 한동안 유행이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의심 사회가 되었다. 나는 또 오늘은 어떤 의심을 해야 하나? 의심하지 않는 순간, 상술 앞에 우리는 호갱이 된다. 의심하지 않는 순간,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질 수도 있다. 의심하지 않는 순간, 사기를 당한다. 이런 사회가 되었다. 진심 안타깝지만, 70~80년대 우리나라가 아직 마을공동체가 완전히 붕괴되기 이전의 감성은 1도 남아있지 않은 사회가 됐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신념을 무엇인지, 나의 삶은 어떻게 단단하게 세워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이럴 땐 진심 내가 아이를 왜 낳았나 싶다. 결국 내가 나중에 아이들에게 하게 되는 말은 이게 아닐까?
"의심하라. 그 의심이 너희를 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