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어른이 되려면 난 아직 멀었다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친구과 놀고 싶은 욕구가 한층 강해졌다. 한 가지 주제에만 몰두하던 아이는 여전히 덕후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한 편으론 또래와 어울릴려고 좀더 적극적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래서 하교 후 집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친구와 놀이터에서 종종 만났다. 같은 반 친구이기 때문에 쉽게 친해졌고, 둘은 잘 어울리는듯했다.
그런데 장벽이 하나 있었다. 아이 친구에게는 2살 위인 형이 있었는데 매일 그 형이 놀이터에서 그야말로 터를 잡고 동생들 노는데 이래라저래라 간섭이 많았다. 내심 신경쓰였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되도록이면 아이가 친구와 놀 때 간섭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친구 영역은 엄마가 대신해줄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생과 아이가 놀다가 뭔가 거슬리게 보였는지 옆에서 내내 고함을 쳤다.
"예의없게 얘기하지마"
동생이 뭔가하려고 하면!
"그건 하지마. 하지말라고"
옆에서 내내 훈수 아닌 훈수를 하는데 듣기 거북했다. 고작 두살 많은데 무슨 권력이라도 되는듯 동생을 통제하려고 하는게 거슬렸다. 다행히 동생은 그 말에 적당히 반응했고, 형과 싸우지 않고 자신이 노는데 집중했다. 보아하니 친구도 없는 모양이다. 혼자서 스마트폰을 들고 노는게 그 아이의 일상적인 모습인듯 했다.
그런데 터질 게 터졌다. 그날따라 친구 형은 그네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시간 넘게 혼자 앉아서 아무도 접근 못하도록 자전거로 그네를 타는 입구까지 막아두었다. 게다가 그네 하나는 동생 자리라고 점찍어두고, 우리 아이가 그네를 타려고하면, 동생이 타기로 했으니 너는 못 탄다며 그네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정작 본인은 내내 그네를 타고 있으면서 내려오지않았다. 보다못한 내가 한 마디했다.
"이 그네는 같이 이용하는건데 왜 다른 사람들은 못타게 하는거니?"
"동생이 타기로 했거든요"
"그럼 네가 오래 탔으니 양보하는건 어때?"
"제쪽엔 줄을 안섰잖아요"
"그럼 그쪽으로 줄을 서면 탈 수 있는거네?"
아이는 그럼 그렇게 하던가라며 점점 말이 삐툴어지기 시작했다. 내심 타고 싶어했던 한 여자아이가 그쪽에 줄을 섰다. 물론 그 아이는 일어설 생각이 없었다. 내가 일어나야 하는게 아니냐고 물었다. 나도 이때는 화가 좀 났다.
"님은 알지도 못하면 조용히 해요"
"공정하지 않아서 그래. 그리고 왜 자꾸 동생한테 화를 내고 그러니? 동생은 알아서 잘 노는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말하지 마세요. 얘에 대해 잘 아세요? 저는 얘를 8년동안 보아왔어요"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가관이었다.
"얘는 아무 것도 몰라요. 학교 가는 길도 모르고, 현관문 비밀번호도 몰라요, 그래서 제가 다 해줘야해요"
옆에서 잠자코 듣던 동생이 어이없어하며 한 마디했다.
"나 학교 혼자서 잘 가는데"
옆에 있던 여자아이도 한 마디했다.
"00이 혼자서 학교 가는거 나도 봤는데"
여러 증언에도 아이는 듣는체도 하지 않고, 그네를 타면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옆에 줄선 여자 아이가 이제 그만 나오라고 하니 결국 그 아이는 분을 못 참고 한 마디했다.
"아가리 닥쳐"
그러면서 자기는 이제 겨우 20분 탔는데 왜 내려야하는지 모르겠다며 옆에 아이에게 꺼지라는 식으로 항변했다. 공정에 위배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가끔 분노를 하던 과거의 내가 갑자기 툭툭 튀어나왔다. 이 아아의 모든 말이 어찌나 거슬리고 억지인지 어이가 없었다. 나는 지금 너의 행동은 공정하지 않고, 억지를 부리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놀이터에서 소리지르는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그만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그 아이는 다시 님은 상관마셔라고 외쳤고, 나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맨처음엔 화가 났고, 이런 아이가 터를 잡고 있는 놀이터에 아이를 혼자 내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뒤돌아서 집으로 가는데 이 아이가 엄마에게 이르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살짝했다. 요즘 엄마들은 자기 자식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적극적이니 내일 나한테 따지러오진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아이 아이는 절대 엄마에게 지금 있었던 놀이터 사건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얘기해봤자 엄마에게 혼났을 것 같다. 엄마에게 혼나기 싫어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을 굳이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나중에 아는 분께 얘기를 들어보니 부모의 성향이 강압적이라고 한다. 그렇구나.. 갑자기 한 숨이 나왔다. 문득 아이가 살아온 10년이 그렇게 녹록치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동생은 네가 잘 보살펴야한다는 말을 많이 들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동생이 잘못하면 이 아이도 같이 혼나지 않았을까. 네가 잘못보니까 동생이 이렇잖아라며. 그래서 어쩌면 이 아이는 자라면서 만난 많은 어른들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 방식으로 대했겠지라는 생각에 이르니 내가 부끄러웠다.
아이를 대하는 방식에서 나도 보통의 어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니... 그리고 이 아이에게 공정성을 운운한다는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논리였을까. 10세 아이에게 공정성을 운운하다니. 이미 공정하지 않는 세상의 맛을 본게 아닐까싶은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그네를 지키고 있는데 말이다.
오늘 만약 아이를 본다면, 아이가 즐겨먹는다는 음료 하나를 사들고 사과를 하려고 한다. 네가 어제 너에게 화를 내면서 말한건 잘못했고, 미안하다고. 그리고 앞으로 너도 동생에게 화내지 않고 말하면, 동생도 더 좋아하지 않을까?라며. 화만 내는 어른들 사이에서 자란 아이에게 굳이 나까지 화를 낼 필요까진 없다. 그러니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게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자세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