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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Jun 21. 2021

아이 친구 관계는 엄마의 영역일까?

내향적인 엄마를 위축시키는 아이 친구 관계에 대해

부모 입장에서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공부도, 등교 시간도 아닌 바로 친구 관계를 걱정하게 된다. 유치원이란 자유로운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다가 학교라는 틀에 진입하는 순간, 아이들에겐 보다 진화한 사회적인 관계가 시작된다. 학교를 아이가 만나는 최초의 사회라고 보면, 최초 사회 안에서 아이의 적응 여부는 부모 입장에선 무엇보다 긴장되고, 조마조마해진다. 일단 아이는 규율은 엄격해졌지만,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다. 학교도 재밌고, 공부하는 것도 즐겁다고 한다. 예로부터 학원을 거부했던 아이는 다행히 방과 후 돌봄 교실에 당첨되어 반 아이들 뿐 아니라 다른 반 친구들과도 안면을 트기 시작했다. 함께 유치원 다니던 친구들도 같은 학교로 배정된 경우도 많아 다행히 아이에게 학교란 낯선 이들의 집합체가 아니었고, 예민한 아이에겐 다행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4월부터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던 친구와 함께 등원했었는데 갑자기 같이 가기 싫다는 것이다.



"나 00이랑 이제부터 만나서 안가. 맨날 자기 먼저 가면서 나보고 배신자래"


사실 내가 봐도 최근 그 친구의 행동은 이해불가였다. 만나면 예전과 다르게 인사로 인사하고, 먼저 뛰어간다. 이는 즉, 등교를 위해 아침에 만나기는 하지만, 학교까지는 따로 간다는 것이다. 학교까지 같이 가자고 만나는 건데 함께 가지 않으니 아이 입장에선 만나서 갈 이유가 없게 된 것 같다. 그 친구는 뛰어간다. 우리 아이는 걸음이 빠르지 않다. 천천히 걷는 스타일이다. 물론 아이도 처음엔 같이 가려도 뛰었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는 그 친구를 따라잡긴 힘들다. 결국 중간에 서서 걸어가고, 그 아이는 먼저 학교에 도착하는 식의 패턴이다. 


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왜 그 아이는 만나서 같이 가지 않고 뛰어가는지에 대해. 처음에는 분명 같이 갔는데 왜 두 아이가 이단 분리하게 되었는지 그 상황에 대해 듣고 싶었다. 그런데 좀 혼자 먼저 가는 친구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친구 엄마도 잘 모르겠다는 반응만 보였다. 함께 가는 거 괜찮냐고 몇 번 물어봤는데 괜찮다고만 했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 결단을 내렸다. 같이 가지 않고, 그냥 따로 가자고. 자연스럽게 만나면 같이 가는 것이고. 그렇게 얘기하고 난 다음날이었다. 건널목 건너편에서 그 친구들과 다른 아이들과 웃으면서 얘기하며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매의 눈을 지닌 아이는 이미 그 상황을 확인했다.


"000, 난 다 보여. 저기 건너갔어"


아이도 아직 풀리지 않는 앙금이 남아있던 모양이다. 나는 그보다 웃으면서 가는 그 친구의 모습이 눈에 걸렸다. 게다가 그 친구는 아침에 매번 아빠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엄마가 나왔고, 다른 엄마들과 아이가 등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얘기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뒤로도 계속 엄마가 나왔다. 동생인 아기를 돌보느라 우리와 함께할 때 거의 매번 아빠가 나왔는데 이제는 아예 엄마가 맡은 것이다. 아마도 그쪽엔 엄마들이 많아서 아빠가 배웅하긴 불편한 모양인가 보다.라고 그냥 생각했지만, 뭔가 개운치 않았다. 



우리가 먼저 같이 안 간다고 말은 했지만, 저렇게 다른 친구들과 잘 웃으면서 가는 그 아이는 왜 우리 아이에게만은 대면 대면했던가. 하교 후 아파트 놀이터에서 만나면 또 그런대로 잘 노는 것 같지만, 예전처럼 신나지 않아 한다는 것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의 마음을 모른다. 그 친구도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명확하게 말로 표현하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이 친구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해한다. 마음 가는 친구와 놀고 싶은게 그 또래 아이들의 마음인가보다라고 넘어가기로 했다.


과한 망상일 뿐이지만, 나는 이 아파트에서 우리만 고립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동네 엄마들과 그리 친하지 못하다. 성격도 내향적이고, 낯도 많이 가린다. 게다가 나이 차이도 많이 나서 처음에 몇 번 친해지려고 노력해봤지만, 힘들었다. 10년 가까이 어린 친구들이니 나는 너무 늙었고, 그들의 감성을 이해하는 것도 더뎠고,  오고 가는 대화 속에 내가 낄 틈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아이도 그 무리 속 아이들과 친하지 않았다. 그중 한 명만 좋아했는데 그 친구는 유치원 같은 반이었고, 지금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과 무리 지어 노는 일이 거의 없었고, 코로나도 벌어져 그야말로 2020년은 섬처럼 살았다. 



결국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내향적인 엄마인 나를 자책하게 된다. 엄마가 친구를 만들어주지 못해 이런 결과가 벌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아이의 교우관계에 판을 제대로 깔아주지 못한 엄마라는 생각에 자책을 빠졌다. 엄마가 고립된 상황이니 아이까지 전염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 친구 관계까지 엄마의 영역이 되어버린 시대가 야속하기도 했다. 도대체 엄마는 아이의 어떤 부분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 걸까. 엄마들끼리 무리 지어 친해지는 많은 이유가 아이들 친구 만들어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엄마들끼리 친해지고, 아이들도 자주 만나다 보니 친해지는 건데 나는 이 부분에서 취약했다. 동생도 너무 어렸고, 첫째는 낯을 많이 가렸다. 게다가 아이는 덕후 기질이 강해 자신의 상상 속 나라에서 살던 시절이다. 



게다가 얼마 전, 같은 친구와 놀이터에서 놀다가 그 친구의 형과 있었던 트러블(놀이터 그네를 독점하는 권력형 아이) 있던 터라 마음이 무너졌다. 마음이 아팠다. 아이가 하교 후 만나서 즐겁게 놀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그렇게 아이를 보내고 나는 눈물이 났다. 천변을 걷고 또 걸었다. 다음날, 건널목을 건너가는 길에 전에 놀이터에서 자주 봤던 아이를 만났다. 씩 웃으면서 나타난 그 아이와 같이 학교에 갔다. 하나의 관계가 끝나면, 다른 관계가 시작되는 건가. 그 친구의 엄마는 나보다도 더 많은 분이다. 우리 큰언니 뻘 되는 엄마라 예전에 놀이터에서 만나 얘기를 하고 연락처도 받았었다. 그다음 날도 그 아이의 등장으로 함께 학교에 갔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이는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한층 성장하겠지. 애초부터 성향이 맞지 않는 친구라 생각하자. 나 역시 이 동네에서 나만 고립된 게 아니라 아직 나와 맞는 이웃을 만나지 못한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연을 만들기 위해 무리하게 감각의 촉수를 가동하기보단 친숙한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먼저 인사하고, 전보다 먼저 아는척하는 방식으로 바꿔보기로 한다. 지난날, 내 인간관계를 비춰볼 때 먼저 과하게 다가간 인연 치고 관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 경험 탓인지 나는 몸을 사렸던 것 같다. 


아이 역시 이런 상황을 겪으며 커가는 거라 생각한다. 상처 없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은가. 아이의 세계에서 아이가 받은 상처도 인생 경험이고, 그 경험들이 쌓여 성숙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도 아이가 친해지고 싶은 친구와 가까워지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야 할 때가 왔다. 걱정은 하면 할수록 규모가 커진다. 걱정하는 상황이 현실이 되는 확률도 높아진다. 다행히 아이는 여전히 잘 지낸다. 학교에선 친구들과 잘 노는 것 같고, 날 좋은 날엔 놀이터에서 친구들과도 잘 어울린다. 그러니 먼저 걱정하지 말자. 엄마의 걱정이 가장 큰 문제이다. 내향적인 나는 아프지만, 아이의 성장을 선을 긋고 바라봐야 할 것이다. 아이가 자랄수록 엄마도 성장하고 있다는 것. 엄마가 된 이후, 인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배운다. 아프지만 배워야 할 것 투성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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