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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Jun 25. 2021

여름의 문턱에 서서

아이와 나의 여름날에 추억이 시작되고...

아이는 이제 곤충에서 식물로 관심사의 가지를 더 뻗어가고 있다. 식물의 세계는 방대하고 디테일해서 생각보다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참나무의 종류에 대해 찾아보다가 나무의 결과 나뭇잎에 대해 생각해본다. 


참나무는 대단하다. 거대한 그늘을 주고, 열매도 준다. 무엇보다 참나무종에 대해 위대함을 느낀 건 거대한 크기였다. 친정집 아파트에 심어진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는 아파트 5~6층 높이를 자랑한다. 처음 이곳에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나무들의 키는 작았다. 나무는 많았지만, 높지 않아 그늘의 넓이가 좁았다. 그런데 초여름, 나무 그늘 아래 서있으니 선선한 바람이 분다. 나뭇잎도 토란잎 정도의 크기는 아니지만, 어른 손바닥보다 몇 배는 크다. 나뭇잎에 주름이 많이 가지 않아 왠지 이들의 생은 근심이 없을 것 같다. 내 손바닥을 보면 잔주름으로 가득해 근심 많은 나의 심기를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으니 나와는 참 대조된다.


나무의 생처럼 굳건하게 한 곳에 뿌리를 내려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 때 나는 방랑의 업으로 삼고 싶을 때가 있었다. 방랑이 내 생에 표어였던 적이다. 그때 나는 떠돌고 싶었다. 하지만 거의 마지막이 되어버린 여행이 끝날 무렵 정착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꽤 많이 떠돌아다녔고, 어디에 있든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유일하게 내가 지킨 자리는 술자리였다. 회식이 죽도록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머릿수를 채워하는 계급인지라 꾹꾹 참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술잔을 들고 배회하는 종족이 신기했다. 내 발은 살짝 현실에서 붕 떠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술자리에서만큼은 중력에 의지했다. 중력에 거역하지 않고, 중력에 순응했다. 하지만 빈 소주잔을 들고 이 사람 저 사람과 술잔을 나눠 마시는 그런 종을 볼 때마다 상상한다. 제발 지구 반 바퀴 순회를 마치고 온 투명한 저 유리잔에 내 입에 닿지 않길, 그런 기회가 내게 오질 않길 기도한다. 하지만 신은 항상 나를 외면했다. 투명한 소주잔이 여러 입을 거쳐오는 동안 약간의 불순물들과 함께 불투명해지기 직전 내게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을 채운 독주로 갈증을 해소하라고 한다. 나는 빈 맥주잔에 맥주를 가득 채운다. 



"소주는 안 마셔요"


배회족들은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을 터이니 나는 맥주 한 잔을 벌컥 마셔 원샷한다. 그들도 기뻐한다. 술을 마시는 어린 여성이 반가운 종족들이다. 술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술잔을 거부해도 마냥 신이 나는 모양이다. 술을 마실 주록 내 정신은 흐릿흐릿해지고, 나는 매번 도망치듯 회식 자리를 몰래 나왔다. 몰래 나온다한들 다들 기억하지 못한다.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 누구와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어렴풋한 실루엣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런 술자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부질없는 곳에 시간을 버렸다고 이제와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그리고 아깝다고 생각한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란 존재의 총합은 내가 긍정하던 시간들과 부정하던 감정들이 합쳐진 결과이다. 



오로지 지금 내가 기억하는 건 초집중을 했던 어느 시간대이다. 그 시간대가 기억으로 남아있고, 어떤 경우 멀리 떠나왔지만 여전히 생생하다. 나이가 들면 먼 기억들이 더 선명하다. 오빠가 아들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멋지게 그려주고, 미로로 그려서 만들어준다고 한다. 엄마는 오빠가 그림을 잘 그렸던가에 대해 잘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오빠의 그림을 기억한다. 오빠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ca시간에 회화반이었다. 지금은 세밀화 스타일인데 그때는 오히려 추상화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오빠의 그림을 유심히 보던 어느 여름방학.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을 선명하게 간직하고 있다.



초집중의 시간을 보낸 나의 중학교 시절, 어느 여름 방학을 기억한다. 나는 허투루 음악을 듣지 않았고, 한 음절 한 음절 머릿속에 각인시켜 들었다. 라디오에 나오던 모든 음악들을 잊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집중했다. 한 시절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기억을 유지하는 방법도 어렵지 않았다. 온 신경을 한곳에 집중하면 발생하는 어떤 가슴 뿌듯함. 봄날의 설렘을 주던 햇살. 바람의 적당한 움직임. 마음의 적절한 요동. 나는 숨을 쉬면서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애쓴다. 애쓰며 살았다. 마음을 열어 애를 쓰고, 가끔 눈물을 흘리며 나의 감정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집중했다.



다시 여름이다. 여름은 아이에겐 곤충 채집의 계절이다. 아이는 온 신경을 곤충잡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곤충은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를 자랑한다며, 곤충 사랑을 노래하는 아이에게 지금 이 시간들은 어떻게 기억될까?



여름의 문턱에 서서 컨디션 난조를 외치는 건 내 심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잠시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다. 지금은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내 생의 연대기를 되돌아보고 있다. 체온이 올라가는 순간이 내 기억의 저장장치가 발동하는 순간이다. 지금은 오로지 내 온 시간들이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있다.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생의 변화무쌍하지만, 만고 불변의 법칙들도 몰랐을 것이다. 여름 바람은 싱그럽다. 나의 묵직한 마음도 이제는 볕으로 나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깃털처럼 가볍게

깃털처럼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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