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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Sep 23. 2021

나는 어디에 나의 할말을  두고 왔을까

고 허수경 시인의 '그대는할말을어디에 두고 왔는가'...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을 빌렸다. 몇 해 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생전 그녀의 언어를 좋아했던 나에게는 암울한 소식이었다. 그녀의 시집들은 내 청춘의 한 시기에 꽤 적절하게 인용되었다. 이를 테면, 취생몽사라든가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같은 시들이다. 이번에 빌린 책은 2003년 출간된 산문집, 길모퉁이 중국식당의 개정판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이다.



2003년도에 이 산문집을 구입해 읽었다. 그때 한참 나는 배낭을 지고, 떠나기를 흠모했고, 실제로 두 달간 헤매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 시절에 만난 이 책은 '중국식당'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을 인식하게 했고, 나 역시 동유럽을 근근하며 떠돌다가 불가리아 소피아를 찾았고,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게스트 하우스 1층에 중국식당을 3일간 연속으로 찾았다. 불친절했던 중국인 젊은 여성 3인방은 점점 더 불친절해졌고, 음식 맛도 그와 정비례하면서 맛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메뉴는 불가리아 산 맥주와 볶음밥이다. 에그 볶음밥, 야채 볶음밥, 커리 볶음밥으로 나름 종류를 바꿔 시켰다. 긴 접시 가득 쌓여 나오는 볶음밥은 언어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나의 여행에 큰 힘이 되었다. 설상가상 불가리아는 영어로도 소통이 되지 않았고, 버스 정류장을 찾다가 여행사에 들어가 위치를 물어보니, 자신은 독일어와 불어만 가능하다면,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몰아냈다. 



그런 기억들이 떠올라 '길모퉁이 중국식당'에 빠져있었는데, 지금은 친정집 책장에 꽂혀있다. 이번에 도서관에서 다시 빌리면서 '수메르어를 배우는 시간'이란 챕터에 눈이 갔다. 허수경 시인은 독일에서 '고대 근동 고고학'을 전공했다. 여러 발굴지를 다니면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이 이 산문집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녀의 전공을 알게 된 순간, 수메르어를 배우다니, 지금 쓰이지도 않는데, 그 언어는 도대체 어떻게 해독이 가능할까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이집트나 터키,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박물관에서 잠깐씩 마주했지만 전혀 알 수 없었던 언어들이다.



인류 최초의 모험 이야기이자 최초의 신화, 서사시라고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가 수메르어로 쓰였다. 언젠가 내가 다시 전공을 선택한다면 역사 쪽이길 바랬던 때가 있다. 중3 때 국사 선생님은 그래 봐야 잘 돼야 '국사 선생님' 아니겠니라고 했던 그 전공. 물론 나는 국사보다는 세계사가 좋았지만, 허수경 시인의 행보를 따라가면서 나는 대리만족을 했던 게 아닐까. 



한때 나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근동, 그곳의 고대어인 수메르어를 해독할 수 있다는 건 과거가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린다는 의미 같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문자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언어들의 회로를 스스로 연결할 수 있다니. 이 산문집을 읽으면서 다시 근동 지역으로 떠나고 싶으나 과연 갈 수 있을까? 지구 상에서 가장 불안한 위험 지역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여행은 이미 코로나로 막혀있고, 세상과 단절되어 사는 기분이 들 때도 있으나, 간혹 다시 책에서 만난 새로운 세상은 언제나 흥미롭다. 터키 도그베야짓 국경에서 이란으로 가던 수송트럭들을 보면서 그때부터 육로로 국경을 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이지만, 코로나가 잠잠해져도 마찬가지겠지만, 오롯 나만 보고 여행하던 그때가 그립다. 결국 나는 어쩜 그곳에(터키, 이집트 근방 어디에) 나의 할 말을 두고 왔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가야 하는데... 그때 나는 좀 더 무르익은 자가 되어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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