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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Aug 18. 2021

음악이 전부였던 시절, 턴테이블에 대한 기억

기억의 창가에서 서성이던 어느 새벽

구획 정리가 잘 되지 않은 동네에 살았다. 주민등록상에 적힌 공식 명칭과 어른들의 입으로 불리는 동이름 다른 동네로 사람들은 달동네라 불렀다.  앞이 뻥 뚫린 집엔 주인집과 셋집이 3개 있었고, 그중 하나가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과 주인집은 오랜 세월 함께 했다. 좀처럼 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이사를 하지 않은 부모님의 성향상 나는 그 집에서 국민학교 5학년까지 살았다. 주인집이 집을 팔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주인아줌마와 엄마는 어디로 이사를 갈지 점집에 가서 방향을 알아봤다고 한다. 그래서 택한 집이 아동복 공장 옆 셋방이었다.


4살에 서울로 이사와 19살까지 그 동네에서 살았다. 그러다 보니 길 가다 만나는 사람 중에 절반은 알거나 알음알음 따지면 다 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래 살던 집에 새로 올 주인은 우리 반 인경이네였다. 인경이는 우리가 이사 와서 가는 거냐고 물었고, 나는 그런 거 아니야라고만 말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텅 빈 마당에 인경이와 나만 마루턱에 앉아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고요한 집, 낮에는 사람이 없어, 대부분 이 집을 지켰던 나는 이제 집사의 임무에서도 벗어나게 된 것이다라고 쾌재를 불렸지만, 우리 사는 형편이 곤궁하여 친구에게 들키는 것 같아 빨리 이사를 가고 싶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 진영이네 집과 멀어진다는 점이다. 진영이 부모님은 고속터미널에서 옷장사를 한다. 진영이 오빠는 군대를 갔다 온 것 같은데 대학을 다니는 것 같지 않았고, 뭔가를 하긴 했던 것 같다. 진영이 네 집은 우리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집 계단을 내려와 통장집 점방 옆 언덕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왼편에 작은 골목이 나오고, 그 끝집에 진영이네 집이다. 진영이네 집은 주인집인데 집 구조가 특이해서 지상의 방은 세를 주고, 반지하에 가까운 집에 방 두 개가 있다. 진영이는 부모님과 함께 쓰고, 오빠 방은 따로 갔다. 


그때 진영이가 나에게 자신의 오빠 방문을 열어줬는지 그 계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이문세 노래를 좋아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으리. 나는 라디오광이었었는데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오빠의 영향으로 종일 라디오를 듣고 살았다. 당시 티브이는 평일에는 오후 5시 반에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는 라디오를 들었다. 이지리스닝이라 부르던 오래된 팝송과 옛날 포크 가요를 섭렵했던 나는, 밤이면 별밤이나 밤디를 들었다. 이종환과 김기덕이란 디제이의 목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리고 이문세와 유재하, 이정석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의 감수성은 꽤나 예민한 촉수를 탑재하게 되었다.


당시 1988년 전후 경기 호황으로 집집마다 전축 세트를 들여놓는 일이 많았다. 우리 앞집 호민이네 아빠는 태광 에로이카 세트를 거실에 들이고 흐뭇해했다. 나는 눈으로만 구경했다. LP가 듣고 싶지만, 카세트테이프에 만족해했던 나는 진영이의 배려(?)로 LP를 들을 수 있었다. 진영이 오빠 방에는 턴테이블과 턴테이블에 연결된 스피커가 있었다. 그리고 몇 장의 LP들이 나를 떨리게 했다. 그중 하나가 이문세의 4집이었다. 이문세의 4집은 판 전체가 명곡이라 더는 설명이 필요 없는 앨범이다. 


- 사랑이 지나가면

- 그녀의 웃음소리뿐

- 깊은 밤을 날아서 

- 그대 나를 보면

- 이별 이야기 

- 가을이 오면  등등....


진영이는 키가 컸다. 개학 첫날, 아침 운동장 조회 때 나는 큰언니가 사준 흰색 땡땡이 투피스를 입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 때 나는 양호실로 업고 달린 것도 진영이었다.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나는 누워서 양호실 천장을 바라봤다. 떼쓰는 아이처럼 마냥 종일 양호실에 누워 있고만 싶었다. 물론 눈을 뜨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교실로 갔다. 친구들이 진영이가 나를 업고 왔다고 얘기해줬다. 그 일 이후로 친해진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다. 


5학년, 6학년 2년간 우리는 같은 반이었다. 번잡한 인간관계의 회로 속에 놓여있던 나는, 5학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성적이 급상승에 반 아이들 사이에서 주류에 편승했고, 다양한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다.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어느 순간, 적당히 하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 주길 바랬던 것 같다. 그런데 부모님은 바빴다. 아빠는 술에 취해 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아이가 어떤 아이로 자라길 바라냐는 질문에 나는 내심 아빠가 '공부 잘하는 아이'라고 답해주길 바랬다. 당시 나는 공부를 잘했으니 아빠가 그 말을 해주면, 더 열심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빠는 그때 4번 문항에 있던 '예의 바른 아이'라고 답했다. 그 얘기가 나를 김 빠지게 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때 나는 맥이 빠졌다. 


그런 날이면 음악에 더 집중했다. 진영이네 집에서 턴테이블로 이문세 4집을 듣고 오는 날이면, 나는 음악 속에 살다온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꿈속 같았는데. 빙글빙글 보는 LP판 위에서 나는 떠돌다 온 기분이 들었다. 위로가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겉으로는 새침하고 도도한 사춘기 소녀였으나 내면은 엉망진창이었다. 불안을 탑재해 어느 순간 도로로 질주할지 몰랐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망상으로 끝났지만, 나는 엇나가고 싶었다.


엇나가고 싶었던 마음을 잠재우던 음악들. 그 음악들이 턴테이블 위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친구 생일날 초대를 받으면, 나는 그 집에 음반들에 눈이 갔다. 한 친구네 집에서는 스콜피온스의 '홀리데이'음반을 반결했다. 홀리데이를 무한 반복하며 듣던 나와 그 노래를 누나 방에서 들었다던 윤석이와 많은 얘기를 했다.


음악 얘기를 할 때면 나는 누나가 있는 남자아이들과 대화가 통했다.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던 음악들은 누나들의 취향이었고, 나와 그 누나들의 취향이 비슷했던 것이다. 누나가 있던 남사친들과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오랜 우정을 이어가진 못했다. 성별이란 벽을 넘지 못한 우리는 국민학교 동창이라는 타이틀 안에 갇혀 끊긴 인연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 얼굴과 대략의 키까지. 내 생각 안에서 뫼비우스 띠처럼 떠나지 않는 이름들이다. 


그 시절의 추억들은 온도가 꽤 높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밖은 따뜻했고, 안은 추웠다. 우리 집 온도는 계속 영하에 떨어져 내렸다. 아빠가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엄마의 목소리는 톤이 높아졌지만, 생계를 위해 두 분 다 늦은 밤까지 일을 했다.


밤 12시에도 부모님이 오지 않으면 나는 불안했다. 11시 반쯤이면 문밖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데 12시가 넘었다는 건 아빠의 신상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는 집으로 오는 길이 힘들었다고 했다 취한 아빠를 끌고 달동네까지 간다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감정노동이다. 엄마는 그 세월을 버텼고, 아빠는 스트레스 속에서 생계를 위해 새벽마다 일어나 나갔다. 


그 무렵, 달동네에 재개발 바람이 불었다. 우리는 한강 너머 신도시 아파트에 당첨돼 그쪽으로 이사가 예정돼 있었다. 다들 쌍문동과 수유동, 미아동으로 이사 가는데 나만 멀리 한강 이남으로 이사 갔다. 그 뒤로 나는 그들을 마주할 수 없었다. 길 가다 스치던 동창들의 모습을 이제 나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울컥하면서 달동네를 떠나오던 날, 내 추억들도 그곳에 유기하고 왔다. 유기된 추억들인 랭킹볼에 무너진 무허가집들 사이에서 함께 함몰됐을 것이다. 나중에라도 나는 그 추억들을 마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기억. 나는 기억과 추억으로 먹고살던 과거지향형 인간임을 그때나 지금이나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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