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내가 꿈꾸던 자유일까...
청춘의 밤은 길다. (사실 뒤돌아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잠시간마저 아까운 청춘들이 거리를 배회한다. 보리빛 청량함을 기억해내고, 결국 맥주에게 기대어 시간을 소비한다. 밤을 삼킬 기세로 맥주를 마신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분위기를 탓하며 3차까지 이어진다. 그 사이 맥주는 유리잔, 유리병, 알루미늄 캔으로 형체를 바꿔가며 분위기를 주도한다. 결국 맥주가 삼켜버린 밤 시간은 다음날, 거대한 피로 폭풍을 만들어 일상을 급습한다. 다행히도 젊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헤쳐나가면서 근근이 버틴다. 퇴근 시간 무렵엔 하루치의 피로감을 또 맥주로 해소할 궁리를 한다. 목적지 없이 맥주의 순환 열차를 타고 돌고 돌고 또 돈다. 그러다 40대가 되었다. 이런 제길!
나의 20대와 30대는 맥주로 시작해 맥주로 막을 내렸다. 맥주는 나의 시대적 연대기에서 빼놓을 순 없는 나란 존재의 특산물과도 같다. 나의 맥주는 주로 종로나 홍대, 서현역, 여의도, 강남역 등지였다. 지역마다 맥주는 특색이 있었고, 분위기도 달랐다. 다른 분위기에 맞춰 나도 다른 방식으로 맥주를 소비하고, 그 지역 상권에 도움을 주었다.
맥주로 인해 즐거웠던 한 때를 떠올린다. 친구와 마셨던 양재동 작은 맥주 가게에서 우리는 노가리를 씹으며 상사를 곱씹고, 나의 불안을 질겅질겅 씹어댔다. 언젠가 친구 집 앞에서 프랜차이즈 맥주집에 가서 50센티가 넘는 소시지를 칼로 하나하나 썰어내며 우리의 청춘을 한탄하던 시절들... 목련 그늘 아래 막걸리와 학교 뒷산에서 마셨던 캔맥주, 인더스트리얼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종로 모퉁이 지하 펍에서 마셨던 맥주들이 여전히 내 청춘을 상기시켜준다. 자꾸 그 시절을 되뇌이는 건 희미하게 남은 미련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젠 시원섭섭한 존재로 규정하고 싶다. 맥주의 청량감은 느낄 만큼 느껴봤으니 섭섭해도 떠나보내자고. 성급할 수 있지만, 오류는 아닐 것이다.
정확히는 맥주가 나를 떠나갔다. 맥주는 적당한 체력이 구비된 자를 반긴다. 유독 나의 맥주는 혼술보다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원한다. 한잔을 시원하게 비워줘야 동지로 받아준다. 내 청춘은 고로 맥주와 함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법의 효력이 떨어져서일까. 20대와 30대를 관통하던 맥주라는 일상의 루틴은 이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가상공간 속 미장센이 되었다. 물리적으로 맥주를 만날 수 있지만, 심리적으로 나는 맥주를 반길 수 없다. 나의 체력은 한계가 있고,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과 쌓인 집안일들이 나란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단조롭지만 나를 단련시키는 이 지루하고도 고루한 시간들은 언제 종결될지 모르겠다.
나는 홀로 밤을 보낸다. 솔직히 밤 시간은 내게 그 어떤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나의 밤은 수면을 취하는, 절기상 겨울이다. 그러다 늦겨울과 초봄 사이인 새벽녘에 깨어나 나를 깨운다. 새벽녘에 맥주는 어울리지 않다. 커피도 부담이 된다. 생수 한 잔과 함께 나를 비추는 명상을 하다 보니 맥주는 더더욱 멀어지고 있다. 어느 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다 눈물이 났다. 이 맥주로 인해 나의 새벽 시간을 소멸될 것이다. 더 이상 맥주라는 유혹의 덫은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나의 새벽과 맥주를 맞바꿔야 하는데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 내 삶의 결이 바뀌고 있는 것 같은데, 그 결이 불규칙적이기보다는 규칙적이면서 단정된 기호처럼 정리되고 있는 것 같다. 슬슬 떠날 사람들을 보내고, 더 이상 나를 증명할 일에서도 멀어졌다. 이제 아이라는 우주 공간과 나란 우주 사이의 접점을 만드느라 분주한데 그런대로 살만하다. 맥주가 없어도 살만한 인생이라니. 철이 든 건지 나이가 든 건지 모르겠지만, 가끔 서럽긴 해도, 그런대로 살만하다. 살만한 세상에 쓸만한 인간으로 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드는 건, 두 아이의 빈틈없는 투정 때문일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버린 일상의 불협화음들을 즐기는 순간, 어쩜 그토록 내가 바라는 자유의 문을 열어젖힌 건 아닐까.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묘비명이 떠오른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