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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Jun 10. 2024

동네 아줌마로 사는 삶

내 눈과 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

결혼 전까지 일하느라 바빴다. 나의 집은 내겐 배드타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나의 동네를 알아가기보단 일하는 사무실 근방의 식당과 술집들이 더 친숙했다. 내가 하는 일은 매번 영혼을 갈아 넣어야 욕을 먹지 않았다. 그렇게 일하다가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집에서 아이들만 키웠다.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 동네 아줌마로 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드디어 아줌마가 되었다. 원래 하던 일은 더 이상 육아와 양립할 수 없었다. 내 영혼은 육아로 인해 매일매일 소진되고 있었다. 소멸된 나란 존재는 새벽마다 불쑥불쑥 찾아와 엄마로 살고 있는 내 앞에서 서성댔다. 그런데 코로나가 지나고, 아이가 놀이터에서 노는 시간이 늘어나고, 친구들과 밖에서 만나는 시간이 늘어난 순간, 나는 아파트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더 아는 얼굴이 늘어나면서 인사를 해야 하는 사람도 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의 시간을 뛰어넘어 동네라는 공간으로 내 영역을 확장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줌마가 되었구나!"


드디어 진정한 아줌마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된다. 나의 적당한 노화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  여유과 까다로운 기질 사이에서 매번 조율하는 나를 보면서 깨달았다. 아줌마의 삶은 사실 별게 없다. 나는 동네 여러 아줌마와 모임을 갖는 그런 부류가 아니니까. 아는 이들은 있지만 정기적으로 만나거나 통화하거나 단톡을 하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그냥 살아간다. 대신 다른 상황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나가는 이들의 말이 종종 귀에 꽂힌다. 주변을 탐색하는 관찰자로 살고 있는 나에게 나는 동네 아줌마라는 닉네임을 붙였다.


동네 아줌마인 나는 청각과 시각이 발달했다. 모르는 이들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서도 정보를 얻고, 그들의 행보를 예측한다. 카페 옆자리에 아줌마들이 지금 아이를 어떤 학원에 보내고 있고, 어떤 마트에서 세일을 하는 지를. 나는 그냥 내 귀를 열어놨을 뿐인데 쏟아지는 말들 사이에서 나는 이 동네 사람들, 특히 엄마들이 얼마나 바쁘고 부지런히 사는지 짐작한다. 


하지만 이런 발달된 청각은 종종 잡음을 일으킨다. 굳이 나는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했다. 저녁 먹고 난 후,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러 아파트 단지 내 운동장으로 향했다. 운동장 옆 공간에선 초등 고학년 아이들 4명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운동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그들은 호시탐탐 자리를 노렸다. 아이의 또래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지켜봤다. 두 명이 물을 먹으러 간 사이 그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아이들도 놀만큼 놀았으니 양보했다 셈 치고 그냥 지켜봤다. 


그런데 계속 내 귀를 괴롭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 ~~ 씨*!!!"


말끝마다 욕을 하는 여자아이였다. 또래보다 키가 작았고,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앞가르마를 탄 채 긴 머리를 풀어헤친 그 아이. 어색하게 욕을 하는데 거의 고함 수준이었다. 아마도 욕을 처음 배우는 게 아닌가 싶다. 욕을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반복되는 그 욕설에 귀가 얼얼했다. 그냥 고함을 치고. 괴성을 지르면 좋겠는데 말끝마다 욕을 내뱉는다. 이제 막 욕을 배워서 그 재미를 쓰는 건가. 그 욕이 차지게 느껴졌다면 나는 그냥 인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너무 어색했고, 소리도 너무 컸다. 내 귀엔 그 아이의 욕이 맴돌았다. 굳이 저렇게 소리 질러 욕을 해야 한다면, 다른 언어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동네 아줌마 모드가 되면서 그 아이 앞에 느닷없이 서있었다. 약간의 미간을 찌푸리면서 참지 못하고 그만 입을 뗐다.


"말끝마다 욕을 하는데 주변에 어린 동생들도 많으면 욕은 그만해줄래"


평소의 나였다면 처음 보는 아이에게 존댓말을 썼을 텐데 이번엔 그만 급발진하고 말핬다. 아이는 나를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제가요?"


순간 아이아는 어쩌면 씨*이 욕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사실 요즘 아이들에게 씨*은 욕이 아닌 것 같다. 그만큼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디. 보편성을 띠고 있다고 하여 욕을 하는데 당연할 순 없다. 요즘 아이들은 원래 그래,라고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 그런 건 없다. 


"원래 그래, 사는 게 다 거기서 거지 뭐."

" 애 키우는 집이 다 그렇죠., 뭐'

"이들 둘 키우면 다 그런 거죠, 뭐"


뭐가 다 그렇다는 건가? 애초에 원래 그런 건 없다. 원래 그래라는 말속엔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너만 그러냐? 다들 그래. 원래 그래.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가. 아이가 쓰는 욕설이 아무리 또래 사이에 대중적인 언어로 쓰인다고 해도 원래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네가 씨*이 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어린 동생들도 있으니 그런 말은 자제해 주렴"

"네"


아이는 기계적으로 네라고 대답했다. 


언어에 민감한 사람으로 사는 게 참 힘들다. 조사 하나에 따라 의미가 다른 모국어를 쓰는 국민이라 그런가. 집으로 가는 길, 가슴이 헛헛해졌다. 주변에 그만 민감해져라, 아줌마야,라는 말이 나왔다. 아이의 욕이 확성기로 떠들어대는 것처럼 데시벨이 높다 하더라고 참았어야 한다고.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러다 아이와 아이의 친구들이 아이를 해고지할 수도 있지 않은가. 다시 나는 엄마모드로 돌아와 불안해한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불안을 키우고, 두려움을 양성하던 나란 존재는 어느 순간 소멸했다. 아직 잔불이 남아있는 건지 불안을 지피고 있는 나를 보면서 대부분의 불안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던 과거를 떠올린다. 불안이란 감정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아직 소심한 동네 아줌마인지라 주춤댄다. 


나대지 않고 조용히 살아야지,라고 다짐한다. 동네 아줌마로 사는 가장 큰 기쁨은 산책이 아니던가. 산책을 하고, 바람을 맞고, 햇살을 쬐이면서 걷고 싶어졌다. 동네 아줌마의 특권이란 동네 산책. 이를 통해 내가 사는 곳이 어떤 곳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동네 산책에 익숙해지는 순간, 나는 나의 동네를 애정하게 될 것이다. 이곳에 온 지 6년 차, 아직은 부족한 것 같다, 나란 존재가 아직 진심으로 이곳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친절한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날도 있었는데 까칠한 아줌마가 되어버린 것 같다. 욕하던 그 아이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 겉만 보곤 알 수 없는, 우리는 어쩌면 다소 복잡다단한 속내를 지닌 호모 사피엔스니까.


산책 중에 만난 뱀딸기
걷다 보면 까칠함도 누그러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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