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소멸되어 가는 나란 존재를 두고 볼 수도 없고...
마음이 심란하다. 기분이 그렇다. 생일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그랬다.
몇 주 전, 남편과 첫째가 축구데이 일정을 잡고 있었다. 그들이 합의한 날짜는 바로 내 생일. 그 둘은 몰랐다. 그날이 내 생일이라는 인식이 없었던 것. 내가 그날 내 생일인데 그날 꼭 축구를 해야겠냐고 물었다. 둘째는 달력에 엄마 생일이라고 써놨다고 덧붙였다. 둘 다 생일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고, 잡다 보니 그날이 비어있었다고.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꼬리를 길게~~~~ 늘어놨다. 내 안에 첫 번째 파장이 일어났다.
두 번째 파장은 생일 선물로 인한 것. 며칠 전, 박스 두 개를 내밀었다.
"자 생일선물"
생일도 아닌데 미리 주는 건 어떤 이유에서 일까? 그전에 남편이 계속 물어는 봤다. 필요한 거 있냐고, 갖고 싶은 거 있냐고. 나는 없다고 했다. 선물은 괜찮다라고. 그래서 결국 남편은 임의로 선물을 마련한 모양이다. 전동칫솔이었다. 본인 것도 구입했는데 아마도 구입하면서 내 것도 산 것이 분명해 보인다. 뭐 그래, 쓰면 됐지. 잘 쓰면 좋지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선물을 주면서 한 말과 말투에 기분이 상했다.
"이게 뭐야?"
"진동칫솔. 이제 됐지? 선물 줬다."
"생일도 아닌데 왜 벌써 줘?"
"택배가 와서"
택배가 왔으니 받으라고 한 것. 근데 뭐랄까 성의가 없게 느껴졌다. 예전에 본인 크록스 사면서 1+1이라고 내 발에 맞지도 않은 크록스를 사 와서 신으라고 했을 때와 유사했다. 물론 마음은 그렇지 않았을 거다. 내 생각을 해서 사준 게 맞을 것이다. 전통칫솔을 쓰고 싶진 않았지만, 일단 생겼으니 써야겠지만, 괜찮다고 한 나의 말은 허공에 흩어진 기분이다.
그리고 어제였다. 천문대 예약을 해서 차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내일 고향 친구들과 모임이 있다고 한다. 지난날에도 모임을 했을 떼 그때 한 달에 한 번은 보자고 해서 내일(즉, 오늘) 잡았다는 것이다. 그냥 기운이 빠졌다. 아 그렇구나, 남편은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 날을 잡아 친구들을 만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우울해졌다. 나는 절대 불가능하다. 남편이 쉬는 날이어도 아이들 성향에 따라 한 명씩 케어해야 하는 경우도 많고, 두 아이를 남편 혼자 데리고 나가는 게 여의치 않으니 되도록, 거의 함께 했다. 남편이 쉬어도, 남편이 쉬지 않아도 나는 늘 육아 중이었다. 무엇보다 친구들 모임 후 사무실에서 자고 나서 아침에 들어오게 될 텐데. 숙취에 정신 못 차리는 남편에게 나는 내 미역국은커녕 해장국을 끓여줘야 하는 건지 울컥했다. 술냄새. 별로 맞고 싶지 않은 그 술냄새를 맡으면서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건 끔찍했다.
오늘 아침엔 토요일 일정이 비었네. 그럼 쉬면 되겠나라는 식으로 말하는 남편에게 또 기분이 상했다. 나는 그날 나갈 거라고 아이들 밥 알아서 잘 챙겨주라고 했다. 파티도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남편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게 시간을 허락해 줬다는 알았다고 했다. 그때 첫째가 엄마 언제 오냐며 울먹였다. 갑자기 왜 그러나 싶기도 한데 이 아이는 내가 기분이 상했다는 걸 포착한 것이다. 그럼에도 남편은 첫째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엄마 생일이니까 엄마 하고 싶은 대로 두자."
그러면서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얘들아 우리 내일 영화 보러 갈까?"
문득 남편과 나는 시간의 개념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남편은 가족을 위한 시간을 내어주지만, 그건 전적으로 아이들에게 시간을 내주는 것이다. 나와 관련해서는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 자신의 시간을 내주지 않다는 것. 내 생일날은 굳이 내가 무언가를 하자고 얘기하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무언가를 같이 하자는 의견을 내지 않는 것이다. 나도 물론 같이 뭔가를 하자고 요구하고 싶진 않았지만, 계획은 있었다. 과천 국립과학관에 아이들을 보내고, 나는 잠시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는 것. 그런데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렇게 하자고 해도 반대할 남편은 아닌데. 뭔가 그냥 기분이 그렇다. 저 사람은 수동적인 자세로 나를 대하는 것. 네가 얘기 안 했으니 나는 몰라라는 식으로, 네가 뭔가 하자고 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 그런 수동성을 당연시하는 게 기분이 나빴다.
어쩌면 이건 나의 자격지심일지 모른다. 나는 늘 나의 시간을 가족을 위해 내어 준다. 아이들이 집에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오늘도 도서관에 왔지만, 마음은 불편하다. 재활용쓰레기도 버려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책정리도 해야 한다. 장도 봐야 하고, 쌀을 씻어 밥도 해야 한다. 세탁기도 돌려야 하고, 마른빨래도 개야 한다. 둘째가 학교 끝나는 시간은 12시 50분. 그러니 도서관에 있을 시간도 별로 없다. 바쁜 마음 한편엔 나의 한 시절이 가고, 육아에만 매달려있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잘 지내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나를 잘 아는가. 나는 계속 이렇게 머물러있어야 하나.
강력한 행동 요령이 필요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쓰는 것뿐. 살기 위해 쓰는 것일 뿐.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즐겁고 행복하지만, 쉼 없이 육아에만 초점을 맞추고 사는 건 종종 나를 무기력하게 할 때가 있다. 남편은 남편의 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나는 없다는 것. 나는 삶에서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것. 그게 생일을 앞두고 심란해진 이유이다. 나란 존재는 집안일과 육아로 나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마음이 그렇다. 나이 들어 아직도 꿈을 꾸는 나에게는 그렇다. 사방에 벽에 갇힌 것처럼 더 이상 누군가와, 친한 친구와도 대화로 해소할 수 없는 문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도 결국 나임을 알기에. 그래서 그냥 쓴다. 그냥 끄적대며 또 다른 나를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