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만은 수포자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5학년이 되니 수학은 더 이상 산수라 불릴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수학은 이제 개념을 통해 공식, 그에 따른 수의 대입, 결괏값 산출이란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연산은 기본이다. 학원에서 예습이 진행되고 있는데 약분과 통분이 재밌다고 한다. 재밌다고 하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학교에서 배우는 단원이 아닌, 학원에서 진행되는 속도에 맞춰 집에서도 복습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어젯밤, 문제집을 펼쳤다. 3단원 약분과 통분 단원 마무리 문제를 풀겠다고 작정한 첫째. 처음에는 술술 푸는 듯했다. 근데 뒤로 갈수록 곡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뒤로 갈수록 바닥에 구르기까지. 이런 문제 누가 푸나, 답은 있는 거냐를 반복하며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절대 엄마의 힌트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며 조용히라고 난리 난리. 몰래 답안지라도 보려고 했는데 이마저도 저지 당했다. 그러면 엄마가 힌트 줄 거라나. 혼자 풀고 싶다며 끙끙댔다. 집안 분위기가 암울하니 둘째는 까불다가 혼자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예민해져 둘째의 장난을 받아쳐주지 못한 것이다. 잠시 우리 집 거실에 태풍이 찾아왔다. 거센 비가 내리고, 세찬 바람이 분다. 첫째의 포효가 시작되면, 마치 번개와 천둥이 치는 듯 요란했다. 심란했지만 같이 화를 낼 수는 없는 법이다. 참아야 한다는 마음속으로 몇 번을 외쳤던가. 되려 둘째한테 이제 양치 시간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나도 제정신이 아니군을 깨닫는다.
근데 몸과 마음은 따로 놀고 있었다. 결국 입을 닫고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태도로 일관하기로 했다. 아이가 쉬운 문제을 풀면 잠시 태풍의 눈에 위치해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태풍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어도 긴장을 놓을 순 없다고 속으로 생각한다. 한편으론 너의 공부가 왜 집안을 들썩이게 하는가. 왜 공부마저 너는 요란하게 하는가. 놀 때도 온 집안사람들 끌어들여 놀더니 공부도 그러한가. 아니 내가 사회 기본서를 펼치면서 한 주간의 복습을 시작한 게 화근이었던가. 공부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좋아하는 사회 과목을 펼쳐 질문도 하고 얘기도 들어보고 하다가 수학으로 넘어간 건데 말이다. 공부 정서가 중요하다던 게 이게 뭔가. 어려운 문제집도 아니었고,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이의 상태는 어떻게 되는 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옆에서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지켜본다.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 이제 앞으로 산적해있으니까. 더 이상 부모의 칭찬에 춤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지지를 해줘야 한다는 걸 안다. 칭찬과 지지는 다르니까. 절망의 고갯마루에서 아이가 스스로 딛고 일어서길 바라는데 모르겠다.
그럼에도 20문제를 다 풀었다.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은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을 문제들이지만) 태풍이 걷히긴 했다. 매미나 카트리나(이건 허리케인인데 ㅋㅋ)가 지난 것 같다. 한반도에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엔 무엇이 남았는가. 전사가가 된 첫째가 도저히 틀린 문제를 되짚을 수 없다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20문제 중 3문제 틀렸다. 대부분 마지막 페이지에서 나왔다. 그래, 이건 영광의 상처라 하자. 3문제나 틀린 게 아니라 17문제나 맞췄으니 말이다. 상처는 아물 것이다. 다만 이렇게 소리친 너를 미래의 네가 잘 기억하길 바란다. 너는 못한 게 아니라 열심히 하는 아이라고. 더 이상 수학은 못하겠다며 성질내지 않는 네가 되길 바랄 뿐이라고 엄마는 말하고 싶다. 초등 5학년부터 수포자가 늘기 시작한다는데 너는 수포자가 되지 않길 바란다는 말도 미리 해두고 싶다. 사실 내가 살짝 들춰봐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수포자였던 엄마를 인정한다). 사고력을 요하는 수학 문제들은 아이들에게 깊은 함정을 만들어놓았다. 빨리 풀고 놀고 싶은 아이들의 사정 따위를 고려할 아량은 없다. 지난한 과정을 통과해야 결괏값을 산출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모양이다. 이러니 학원에서 빨리 풀 수 있는 요령을 알려주는가 보다. 아이가 지나는 과정은 느리고 고되다. 어쩌면 빠르게 지날 수 있는 고속철도가 깔린 길이 있을 것이다. 그 길을 모르니 매번 무궁화 행이 아닐까. 가끔 ktx를 타기하지믄 관련해 물어보면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애매한 대답이 나온다. 모든 길을 빠삭 다 외울 수 없지. 수학이란 게 얼마다 다양한 노선이 있는가. 아이가 매번 미주 노선에 오르더라도 가끔은 동남아 휴양지행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결론적으로 엄마가 그 노선을 선택할 수 없다. 아이는 자기가 아는 선에 노선을 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왕복으로 끊으면, 완료가 되는 거고, 편도 행을 타면 영영 못 돌아올 수도 있다. 결국 현지에서 수소문해서 티켓을 구입해야 제 자리로 오게 되는 것. 공부란 게 그런 거지. 남이 해주면 기억도 못 하고 어디 갔다 왔지도 모르지 않는가. 학원에서 분명 약수와 배수를 배웠지만, 집에 오면 약수와 배수는 어디로 갔는지 연락도 안 된다. 깜깜무소식으로 살다 보면 결국 수포자의 길을 걷게 되겠지.
고등학교 때 m을 에무로 발음하는 수학선생님이 계셨다. 그분은 항상 혼자서 온 칠판에 열심히 문제를 푸신다. 우리는 그분의 설명을 해석하는 게 어려웠다. 그분은 매번 미주리 노선에서 편도를 끊고, 그곳에 머물며 주어진 문제를 완료한다. 그리고 다시 티켓을 끊고 교무실로 향한다. 매일매일 자신과의 싸움에 헤매거나 이기거나 했던 그 선생님. 덕분에 우리 반 대부분의 아이들이 수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그분처럼 열심히 문제를 대하고 푸는 분이 계실까. 학원에서 만난 인기 수학강사의 설명을 들을 때 감탄하고 돌아섰던 기억이 난다. 둘 다 내 머릿속에 접수되지 않은 건 똑같다. 결과론적으로 같은데 인기 수학강사는 다른 퍼포먼스가 있었다. 그분은 문제를 오래 붙들고 있지 않았다. 매일매일 전용기를 타고 휴양지를 갔다가 되돌아오는 왕복코스였던 것이다. 저렇게 쉽게 풀다니, 나도 저렇게 풀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나는 북극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었다. 반면 고등학교 때 만난 수학선생님도 나와 같은 노선을 탔지만 그분은 마지막엔 결국 탑승에 성공한다. 우리는 편도를 타고 극지방에 도착했고, 그분만 며칠 걸려 탑승하는데 성공한다라는 스토리로 정리할 수 있다. 끈기를 가지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그분의 태도에 나는 이제서야, 30년 넘게 지나서야 감탄한다. 결국 공부는 혼자 하는 거잖아를 뒤늦게 깨달은 바에서 나온 성찰이다. 왜 친구들과 같은 독서실을 다녀도, 주말마다 도서관에 같이 가서 공부를 해도 각자의 수능 성적이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서 대구의 여지가 없다. 이 모든게 개인차였던 것.
내 손으로 퍼서 내 입으로 들어가는 그 밥의 질감. 우리가 기억하는 밥에 대한 정서이다. 누군가 억지로 먹이면, 내게 피와 살이 되는 것 같지 않고, 거부감만 들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인간이란 경험을 통해서만 헤쳐나갈 수 있는 영역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중 하나가 공부일 것이다. 머릿속으로 안다고 세뇌시켜봐야 시험 보면 탄로가 난다. 그러니 나는 어젯밤 아이의 포효가 아이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이길 바랄 뿐이다. (물론 아이는 그 뒤로 자기 직전, 게임하자고 나를 보챘지만, 거부했다. 나는 아이보다 먼저 쓰러졌다.) 지켜보는 자의 심리적 압박과 동요는 그 자체로 엄청난 노동이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도 이런 패턴으로 반응하지 않길 바랄 뿐. 여하튼 태풍은 지나갔고, 나는 지난밤 못한 설거지를 새벽에 일어나서 마무리했다. 식세기에 마저 들어가지 못한 접시들을 정리하면서 나도 나만의 노선을 그려본다. 편도여도 괜찮으니 헤매봤으면 하는 바람. 이는 미진했던 내 청춘의 열망에 대한 소회이기도 하다. 할 수 있을 때 다 보기! 내 삶을 이롭게 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그래서 결국 나는 다시 뭐든 끄적이며 새벽을 흘려보내고 있는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