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설 연휴 때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 전부터 남편은 대만에 가자고 했다. 탐조의 나라로 알려진 곳이다. 첫째도 당연히 좋아했다. 둘째는 버블티를 좋아한다. 우유는 먹지 않지만, 흑당버블티는 먹는다. 나 역시 대만이 꺼려질 이유가 없다. 대만 영화를 좋아했다. 한때 나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에 빠져있었다. "동동의 여름방학"."카페 뤼미에르", "타이베이 카페 스토리" 등의 영화들. 물론 대표작은 그 유명한 "비정성시"이지만.
설연휴 기간이라 중국 춘절이 걱정된다. 민족대이동이 일어난다는 대륙의 땅, 중국은 아니지만, 한족이 많은 대만도 춘절이 있을 것이다. 이는 중화권 문화 국가들 모두 다 해당되는 것. 그런데 내가 이를 무시했다. 남편에게 물었다.
"그때가 춘절 기간 아니야?"
"여긴 달라" 남편이 말했다.
그 달라가 뭐가 다르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어야 했다. 여행을 계획한 한 달 전, 남편은 쳇 gpt와 대화하느라 바빴다. 그는 인간 대 인간으로 소통하는 것에 굉장히 답답해했다. 일적으로 컴플레인을 거는 방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여행 일정을 짜는 것에 자신만만해했다. 왜냐하면 그는 쳇 gpt에게 일정을 맡겼기 때문이다. 갑자기 문서를 들이밀었다. 춘절 이슈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던 남편은 쳇 gpt와의 대화에 빠져 그를 급신뢰하기 시작했다. 내 말은 음식으로 흡수불가능한 비타민D 같은 것. 내가 말을 해봤자 남편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진 못한다. 여러 문서들을 내게 건네고 어서 선택하라, 닦달했다. 일전에 우리가 말했던 일정은 모두 빠져있다. 내가 말했던 곳도 다 빠져있다. 그는 오로지 쳇 gpt의 말만 들었다.
몇 년 전 오키나와 여행을 떠올렸다. 오키나와 근방 요론섬에서 한달살이를 한 내 친구 남편에게 남편이 물었다. 거기 갈 때 뭐가 꼭 필요하냐고. 놀랍게는 내 친구 남편은 아이스박스라고 했다. 더우니까 꼭 챙기라고. 남편은 실제로 작은 아이스박스형태의 가방을 가지고 가려고 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내 속이 타들어갔다. 미쳤냐며 그는 거의 캠핑 수준의 여행을 한 것이라고, 그들은 에어컨 없는 숙소에서 한달살이를 한 거라고 했다. 곧 두 돌이 되는 아이를 데리고 캠핑을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남편은 캠핑을 싫어한다. 조식 있는 호텔을 좋아한다. 야전에 익숙지 않는 도시인인 남편은 맥락 없이 정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때가 있다. 그걸 또 내가 간과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새벽... 톡이 계속 온다. 춘절이라 난리 나는 카페글을 본 것이다. 춘절에 대한 나의 우려에 대해서는 남편은 기억하지 못했다. 나보고 너도 보지 않았냐며 자기가 보여준 건 2025년 춘절이라 일정이 달라서 우리 일정이랑 안 겹칠 줄 알았다는 것이다. 맹꽁이 같은 대답을 듣고 있자니 내 발등을 내가 찍은 격이라 할 말이 없다. 기운이 빠졌다. 생각해 보니 남편은 해외여행을 제대로 가본 적이 없다. 결혼 전 도쿄여행, 결혼 후 아이와 오키나와 여행 두 번의 경험뿐이다. 나라도 오직 일본. 나머지 유럽 투어, 네팔, 인도는 출장을 간 것이다. 그는 해외여행 초심자이다. 나는 남편과 싸우기 싫어 대만 여행을 덮어 두고 있었다. 대만 여행에 대해 논의할수록 감정싸움만 격해졌다. 자기가 일정을 짰으니 지금 원하는 걸 얘기하라, 현지 가서 바꾸지 말라, 숙소는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본인이 다 예약했다. 개입하면 싸우니까 나는 조용히 있기로 했다. 7박 8일이 너무 길다는 생각에 더 줄이길 바랄 뿐이었다. 배낭여행으로 한때 다져진 내 여행 근육은 그냥 지방상태로 두기로 했다. 그리고 망했다.
춘절... 나는 춘절을 싫어한다. 아니 여행 중 명절이나 축제를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송크란 시기에 태국에 갈 생각이 전혀 없다. 예외적으로 네팔 디왈리 축제는 좋았지만, 인도 홀리축제는 절대 가고 싶지 않다. 라마단 기간에 이슬람국가 여행 가는 심정으로 춘절을 버텨야 하는가. 식당 문을 많이 닫는다는데, 박물관 이런 곳도 다 휴무인데... 망행이구나싶어 속상했다, 일단 그랬다.
그러다 마음 다잡는다. 현지식당이 문 닫는다는 게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진 모르겠다. 일단 춘절 전에 맛집은 다니고, 박물관도 간다로 일정을 축약한다. 초반에 먹잘러 첫째를 위한 일정을 짜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둘째가 잘 먹지 못하리라는 걸. 향신료에 쉽게 적응할 나의 아들이 아니다. 둘째는 내 입맛과 똑같다. 냄새도 잘 맞는다. 그래서 고민을 내려놓기로 했다. 둘째는 쇼핑몰 가서 놀고, 식당 가서 영 못 먹겠다 싶으면 편의점, 패스트푸드점을 이용하기로. 야시장도 향신료 냄새로 가득하다. 경험이 없는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무도 모른다. 한식당을 미리 예약해서 가야 할 수도 있다. 식당 이슈는 그냥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문제는 볼거리. 산을 가야 하나, 온천마을에서 1박을 하고, 타이베이 근교 투어를 이용하기로 한다. 타이난 일정을 잡는 게 무리라는 생각도 든다. 교통편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기차를 이용할 수 있는 곳, 기차가 관광상품인 곳을 찾는다. 어찌 됐든 호텔과 비행기표를 예약했으니 가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한다. (근데 최근 타이베이 시내에서 묻지 마 난동사건이 일어났음...) 일본도 좋지만 거긴 지진이 언제 올지 모른다. 이미 지진이 상주하고 있는데 잠자코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얼마 전 첫째반 친구가 일본 갔다가 진짜 지진을 만났다고 했다. 집에 못 오는 줄 알았다는데 나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진 않다. ㅠㅠ
여행을 가려면 일단 저질러야 한다. 저질러놔야 갈 수 있다. 가정 경제를 생각하면 여행을 가면 안 된다. 하지만 미래는 불투명하고 여행은 일정이 가까워올수록 선명해진다. 결국 나중에 떠올린다. 여행이 가장 좋았다고. 그렇게 될 것이다. 여행 가서 싸우긴 했어도 후회한 적은 없다. 여행은 인생에서 가장 확실하고 투명한 결과물을 가져다준다. 그나저나 나의 FM2는 어디로 갔는가. 친정집에 가서 내 필름카메라인 FM2를 찾았다. 당시 가격 50만 원 때였던가. 근데 사라졌다. 내가 집에 가져왔는가, 다른 곳에 두었는가, 기억나지 않는다. 필카를 가져가고 싶다. 아쉬운 대로 로모라고 여행 때 챙겨가야겠다. 이래저래 나는 왜 돈 쓰는 선택을 매번 하는가. 스마트폰 카메라도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