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가까워질 수도, 더 멀어질 수도 없는 인연
아빠에게 오빠는 집 앞 문방구 앞에서 출근하는 아빠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어린 시절, 오빠는 아빠가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문방구 앞에 앉아있었다. 그 전날 봐 뒀던 장난감을 묵시적으로 사달라는 시위를 매우, 자주 했다. 모른척하리 없는 아빠는 어김없이 오빠의 욕망을 충족시켜줬다. 오빠의 장난감 포대 안엔 장난감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이것이 아마도 아빠와 오빠의 마지막 상호 활동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집안은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엄마와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집에 거의 없었다. 낮 시간을 채우는 건 아직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두 동생이었다. 오빠는 정시에 맞춰 등교를 하고 종 치자마자 바로 하교하는 집돌이가 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이후 오빠와 아빠의 상호활동은 거의 없다고 본다. 오빠와 엄마의 상호활동 역시 상호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엄마는 오빠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많이 했다. 오빠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부에 소질이 있었던 오빠는 서울 상위권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이었기에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오빠가 아빠에게 완벽하게 벽을 쌓은 건 고3 때였다. 그날의 공기를 나는 아직 기억한다. 오빠는 심통 난 얼굴로 집에 오자마자 화를 냈다. 학교에 절대 오지 말라고 했는데 아빠가 담임을 만난 모양이다. 입학 상담 때문에 찾아간 것 같은데 아빠는 오빠에게 얘기하지 않고 찾아갔다. 아빠는 그날 밤 혀가 꼬일 정도로 술에 취해 들어왔다. 전교 30등 안에 든 오빠가 공부를 못한 건 아니지만, sky를 바랐던 기대가 무너져버렸다는 생각일까 아빠는 절망에 빠졌다. (사실 오빠가 태어난 해 유독 애들이 많이 태어나 초등학교 때 17반까지 있었던 적도 있음. 인구과밀) 담임이 D 대 얘기를 했다는데 학교보다는 과에 맞춰 오빠가 가길 바라는 대학을 추천한 모양이다. 물론 오빠는 경찰행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신문방송학과나 국문과를 가고 싶어 했다. 1 지망은 늘 경영학과였지만 2 지망은 국문과였다. 선지원 후시험이던 당시 대입 학력고사 시절 어찌 됐든 오빠는 재수하지 않고 서울 상위권 대학의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과가 맘에 안 들었던 것 같다. 재수를 하고 싶어 했지만, 오빠는 그냥 자리에 눌러앉았다. 대신 장학금을 받기 위한 공부로 에너지를 집중했다.
모험을 하지 않았던 오빠는 어린 시절부터 오빠의 모험을 두려워하는 부모님들과의 불협화음이 귀찮았기 때문에 아닐까 생각한다. 오빠의 모험은 내가 아는 한 많지 않다. 군대 가기 전 설악산 대청봉을 7시간 만에 올라갔다 내려온 짧은 여행. 은행에 취업했지만 포기하고 다시 공부를 해서 공기업에 들어갔다는 정도이다. 이후 IMF가 터지면서 오빠의 선택을 탁월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취업 후에도 오빠는 주말에는 집에만 있었다. 대신 얼리어답터 생활에 점점 더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첫 번째가 디지털카메라였다. 2000년대 초반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큰 인기를 몰았다. 나도 2003년에 두 달간 동유럽 여행 기간 동안, 오빠가 산 산요 일명, 마징가를 들고 여행을 하기도 했다. 많은 디카를 사진 않았는데 모델에 대한 빠삭한 정보를 입수했고 덩달아 나도 디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오빠는 시계, 만년필, 그리고 스마트폰까지 얼리어답터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결혼 전까지 주말 아침과 점심, 오빠의 아침을 챙겨주는 건 아빠였다. 어느 날은 라면도 끓여주기도 했다. 30대 중반이 넘도록 장가 못 가는 아들 때문에 오만상을 다 찌푸리면서도 꼬박꼬박 밥을 차려주는 건 아빠였다. 엄마는 늘 아침에 나가기 전 나에게 오빠 밥 차려주라고 하고 나갔는데 가끔 내가 늦게 일어나면 아빠가 먼저 밥을 차려놓고 오빠를 깨웠다.
오빠가 결혼할 여자를 데려온다고 할 때 나는 늦은 결혼인데 반대할게 뭐 있을까 했다. 하지만 역시나 아빠의 기대치에는 못 미쳤나 보다.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썩 내켜하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도 아니고 뭐 어쩌고 불만을 했지만 오빠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혼집을 차렸고 아이를 낳고 새언니가 다시 직장에 다니면서 직장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
새언니가 애를 키우고 집에 있을 때 아빠는 손녀를 보기 위해 건수를 만들어 집을 찾아갔다. 시아버지의 느닷없는 방문에 어떤 며느리가 좋아하겠나. 오빠네 집에 갔다 오면 아빠는 늘 화를 냈다. 아빠의 방문에 불편한 마음이 컸던 새언니는 모르긴 해도 티가 나긴 했을 것이다. 워낙에 예민한 아빠이니깐 더욱 그 감정을 크게 받아들였을 테고. 여하튼 오빠네가 이사 가고 난 후 고요해졌다. 멀리 이사를 갔기 때문에 자주 못 본다. 오빠는 그렇게 아빠와의 상호활동이 활발할 수 없는 곳으로 멀리멀리 떠나갔다.
아빠는 북적대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다. 가끔 북적될 수 있도록 자식들이 방문하면 그만인 분이다. 오빠는 아주 가끔 오지만 아빠는 오빠가 올 때를 가장 많이 기다리는 것 같다. 기대하진 않지만 기대할 수밖에 없는 아들의 방문. 예나 지금이나 아빠에게 오빠는 여전히 집 앞 문방구 앞에서 아빠를 기다리던 아이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아빠가 돌아가신 후, 둘의 상호작용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식이 인생에서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지 애를 낳고 나서야 조금은 이해한다.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짝사랑, 그 절대적인 사랑의 깊이는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그 시대 부모님들은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애틋하면서도 가슴 저린, 그런 관계가 바로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