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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Jul 29. 2020

벽에서 자라던 풀들에게 안부를 묻다

포카라 홍금보식당의 풀들은 여전히 살아있을까

떼로 몰려 놀던 여행 동료들이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하러 간다. 나 역시 카트만두에서 이미 퍼밋을 신청했기 때문에 함께 가도 되는데, 반골 기질이 터져 나와 함께하는 라운딩을 포기했다. 그때 함께 갔다면, 추후 친구들을 다시 만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ㅎㅎㅎㅎ 등반은 인간의 본성을 자극한다. 이기적인 유전자가 극에 달하기 때문이다. 내 몸 편하자고 주변을 괴롭힐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배회하다 비구니 스님 3분을 만났다. 10일간천천히 안나푸르나 등반을 한다고 하시길래, 바로 무임승차했다. 어릴 때는 이런 식의 방황이 많았다. 하나의 모임, 하나의 인간, 하나의 무리들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녔다. 이는 여행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착이 불가능해 여행을 하며 떠돌았던 것일까.





일단 우린 모두 통일된 입맛을 가지고 있다. 비구니 스님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채식을 하고, 나는 자진해서 채식주의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함께 한국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는데 쌈 채소를 1인 1바구니씩 하는 것 같았다. 모두들 대식가였고, 자신들이 대식가인 이유는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곡기로 채우는데 이게 금세 배가 꺼져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나푸르나를 오를수록 이분들의 곡기 타령은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초반에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데 지나가는 새들도 도망갈 지경의 수다였다. 쉬지 않고 스토리를 내뱉은 이 세 분의 대화 속에 나는 낄 틈이 없었다. 나는 좀 조용히 산을 오를 수 없을까 고민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말을 줄이면, 배가 덜 고프지 않을까. 말을 저렇게 많이 하고, 심지어 타령까지 부르는데 어떤 체력이 남아나겠는가. 게다가 여기는 동네 뒷산도 아니고 안나푸르나 산중 아니던가.





불만스러웠지만 불만의 불씨를 잠재우고,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멀찌감치 떨어졌다가 다시 그분들이 보이면, 합류하는 식으로 방향을 틀었다. 안나푸르나를 오르며 발동한 나의 또 하나의 허세는 바로 묵언수행 같은 것. 말을 줄여보는 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이는 스스로 나는 채식을 하니까 에너지를 아껴야 하고, 그러려면 입을 다물어야 하고, 몸의 모든 에너지를 등반에 집중해야 한다고. 암암리에 나는 그분들과 멀어지고 있었다. 덩달아 채식을 주장했던 포카라 선언도 점점 더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결국 안나푸르나를 등반했지만, 내 기억 속에 가이드와 추억과 현지에서 스쳐간 히말라야 일꾼들, 날아가는 새, 흔들리는 풀들. 활짝 핀 꽃과 뭉게구름들이었다. 동반자였지만, 그분들과 많은 추억을 함께할 수 없었다. 그분들은 종교인이지만, 감정을 드러내는데 서슴지 않았고, 나는 내심 불편했다.





그중 한 분만이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나머지 두 분은 나의 방황과 거리두기를 인식하고, 내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분들께 다가가지 못했다. 그 한 분만은 나의 젊음을 칭찬해 줬다. 젊음이 칭찬받을 일은 아니지만, 젊은 그때의 내 모습을 예쁘다고 표현했다. 나는 의야해했다.



비구니 스님 3분과 포카라에서 내려와 한 숙소에 잠시 머물 때다. 그때 인도 뱅갈로르에서 올라온 40대 중반의 남자분이 있었다. 이분은 인도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어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다고 하는데 직장 때문에 혼자 인도에서 살고 있다. 그분이 포카라에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포카라에 럭셔리 호텔인데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나와 당시 또 다른 여성 한 분과 셋이 그곳으로 밤마실을 갔다. 징검다리를 건너가니 노란 조명 아래 개별 숙소들이 멋드러지게 펼쳐져 있었다. 대충 구경하고 나와 헤어졌다.


그 다음날,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나에게 얘기했다.


"그 남자가 소형이 보면서 밤에 푹 끌어안고 자고 싶다고 하더라"


웃으면서 얘기하는데 웃음 뒤에 남자 조심하라 이런 의미였던 게 아닐까.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여행 중에 나는 나의 성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여성과 남성이 아닌, 여행자. 여행자에게 성별을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때 나는 여행자는 국적도, 성별도 무의미하다고. 세상을 떠도는데 필요한 건, 배낭 하나와 내 몸뚱아리 하나, 그리고 발 뻣고 잘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가당치도 않은 생각인지 이제 와 생각하니 웃음만 나온다. 그날 비구니 세분은 카트만두로 갔고, 나는 홀로 포카라에 남았다.



마음이 헛헛해지고, 허기가 몰려왔다.  따뜻한 뗀뚝(한국식 수제비랄까) 한 그릇이 먹고 싶어졌다. 배를 채우려 익숙한  홍금보 식당에 가니 전에 만났던 여행자가 식당 벽을 페인트로 꾸미고 있었다. 홍금보 아저씨가 괜찮다고 했음에도 그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페인트와 붓을 자비로 구입해 밋밋했던 벽에 덩굴을 그렸다. 3일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테이블 몇개 되지 않는 작은 곳인데도 꽤나 시간이 걸렸더.



완성된 벽을 보니, 풀과 풀들이 얽히고 설켜 푸릇한 향이 나는 것 같았다. 문득 노동이 그리워졌다. 이제 나는 노동을 해야 하는가. 지금이 한국에 들어가야 할 때인가. 이런저런 상념에 빠졌다. 다시 방황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나는 하릴없이 한참 풀들을 바라봤다. 분명 벽에서 풀들이 자라고 있다. 벽 속이 뿌리 내려 자라고 있던 그 풀들은 그때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어느 블로그에서 다시 만났다. 블로그 주인은 예전 네팔 여행기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중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심쿵 했다.  홍금보 식당을 배경을 한 사진에서 그 풀들이 불쑥 내게 안부를 전한 것이다. 나는 반갑게 풀들에게 인사했다.



아직 너희들 살아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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