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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May 03. 2020

밤에 피는 꽃

90년대 중반, 신촌의 기억

90년대 중후반, 신촌 제우스 호프집.

제우스는 지리산과 함께 당시 신촌에서 가장 싼 호프집이다.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들이다 보니 항상 술값에 민감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단골이 되었다.



나는 항상 이곳에 가면 황도를 시켰는데, 

제법 큰 유리그릇에 황도와 얼음이 적절히 배합돼 먹을 만했다.

기억 속의 가격은 3천 원? 정도.

우유를 넣어주는 화채보다는 깔끔한 황도가 좋았다... 라기보다 저렴하니깐 좋아했던 것이다.

주머니 사정에 따라 입맛의 수준을 낮춰야 했던 시절이었다.



가끔 취직한 선배가 한턱 쏘는 자리가 생기면

승냥이 떼처럼 몰려들어 치킨을 뜯어먹던 동기들을 보면서

식욕이란 얼마나 간사한지 속으로 비웃었다.ㅎㅎㅎ

식욕을 드러내고 싶지 않던 시절이라 나는 그저 맥주로만 승부했다.

그러다 결과적으로 처참한 사건을 남기기도 했지만...



10명 좀 넘는 인원들은 방학이면 세미나를 핑계로 이 동네, 저 동네 

서울을 누비며 술을 마셔댔다. 그날도 세미나였을까?

정확한 기억은 없다. 워낙 술을 많이 마셨고, 종로 아니면 신촌에서 많이 모였으니까.

(사실 알코올이 들어간 기억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마구잡이식 안주(저렴한 안주 퍼레이드)로 1차로 제우스에서 배를 채운다.

멕시칸 샐러드와 노가리, 황도 등 3가지 메뉴를 세트로 시키면, 

약간의 디시가 되는 종합세트메뉴를 시킨다.

맥주와 소주, 그리고 세트 메뉴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어쩜 나는 혹시 공룡시대, 테리지노사우르스처럼 

육식도 초식도 아닌, 잡식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잡스럽게 먹었다. 

살짝 아쉽지만(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배가 차도 허한 법) 자리를 정리하고,

지하 1층 마지막 계단에 오르면, 어느새 거리엔 해가 져있었다.



어둑어둑해진 골목엔 술이 고픈 청춘들이 거리로 헤매고, 우리도 합류한다.

2차로 소주집을 가고, 3차로 포장마차를 가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꽃을 파는 아줌마.

집요하게 파고들어, 기어이 꽃을 파는 기술을 보여준다.

선배들이 친 장벽은 그분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런데 남자 사람들과 여자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라 

누구 하나에게 꽃을 사주기도 민망하다.

결국 선배들은 장미꽃 여러 송이를 사서

그날 나온 여자 사람 후배들에게 나눠줬다.

골라잡으라고 던져주면,

 우리는 맘에 드는 꽃송이(도긴개긴인데)를 물색해 하나씩 골라잡았다.

하지만  그 후 이어진 술자리 과정 속에서 꽃은 사라진다. 거의 매번.



기별도 안 하고 사라진 장미꽃 한 송이는 꼭 술 마신 다음날 눈 앞에서 어른거린다.

내가 어디에서 꽃을 두고 왔을까? 

과도한 음주로 인해 상실된 나의 기억력이 부팅을 하는 과정에서  

자주 등장했던 미장센 같은 꽃 파는 아줌마.



해마다 꽃은 피고 지는데,

밤마다 꽃을 팔던 아줌마는 어디로 갔을까?

늦은 밤에 만난 꽃은 왠지 그늘져 보여 슬펐다.

사주기 안 사주기도 민망했던, 

괜히 미안해지던, 청춘의 시간들.



당시 청춘들은 뭔가에 그리 취해 살았는지

별 얘기도 없으면서 만남이라는 연대를 그리 자주 했는지,

밤이 깊을수록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왜 그리 무거웠는지,

내 안에 쌓인 무수한 감정들을 술처럼 들이붓는 건지 알 순 없던 시절.



현재를 단편적으로 즐겼던 시간은 그때가 유일했다.

그 이후 다들 뿔뿔이 흩어졌고,

밥벌이에 골몰하느라 당시의 시간을 덮어두고 산다.



그러다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화자가 마들렌을 한 입 물었을 때

봉인된 기억들이 떠오르듯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노점상을 보면 생각난다.

그마저도 몇 년 전, 명동에서 본 게 마지막이다.



아직도 서울 한 복판, 술집이 즐비한 포장마차 거리에서 

취객들에게 꽃이라는 감성을 일깨워주는,

그들의 행위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가?

문득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밤이다.



밤에도 꽃은 핀다.

비록 화려하지 않아도 

삶의 언저리에서 힘겹게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에겐 꽃보다 밥이 중요하겠지만.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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