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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May 04. 2020

버스는 이미 떠났다

내 머릿속의 지도가 사라진 날을 애도하며

2004년 mb가 서울시장인 시절, 서울시 버스 노선이 개편되었다. 그때 나는 내 추억이 도난당했다는 느낌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버스 노선 개편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다. (갑론을박이 초반엔 있었지만, 추후 긍정적인 면이 많다고 평가를 받긴 했지만....) 나는 당시 버스 노선만으로 내 머릿속에 서울의 지도를 만들었다. 서울 어떤 곳에서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강력한 회귀본능의 노하우를 나는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버스가 4자리까지 늘어났고, 버스 색깔도 달라졌다. 내가 기억하던 노선들이 다른 번호로 바뀌었지만, 노선 자체도 변경되면서 더 이상 내가 알던 버스가 아니었다. 그때쯤이었나. 나는 서울의 버스를 잘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집도 이미 경기도로 이사간지 오래였으니 서울시민 입장도 아닌데 이런 격한 반응을 보일 이유도 사실 없다. 하지만, 내게 버스 번호는 학창시절의 추억 그 자체였다.


당시 우리 집은 미아리 쪽이었다. 서울의 변두리이긴 했지만, 수유리보다는 덜 변두리였던 동네였다. 25번 버스 종점에서 내려 15분 이상 걸으면 집에 도착한다. 나는 버스 종점의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국민학교였던 시절에 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엄마는 일 때문에 입학식에 참석하지 않고, 아빠가 왔다. 나는 다른 친구들은 모두 엄마가 와서 반겨주는데 나만 아빠가 와서 내심 서운했다. 그런 서운함으로 아빠와 나 사이의 거리로 표현됐다. 버스 종점에는 까치 담배와 오방떡을 파는 할아버지 점방이 있다. 아빠가 주로 까치 담배를 파는 그곳에서 오방떡을 사줬다. 그 오방떡을 들고 집까지 걸었다. 부녀는 말이 없었다. 딸은 너무 어렸고, 아빠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지만, 그 어떤 의미였던 사이. 걷다 보면 작은 슈퍼가 있었고, 언니가 중학교 입학 때 꼭 들고 가고 싶어 했던 가방이 파는 잡화점이 있었고, 내가 숫자를 잘못 보고 100원을 들고 바나나를 사려 했던 과일가게가 있었다. 그 길 위로 자연스럽게 작은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비릿한 생선 냄새가 풍기던 어물전을 지나면, 집까지 반이 남은 것이다. 삼거리 슈퍼와 대우 전자 대리점을 통과해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당도했던 그 집. 어린 나는 가파른 길을 다니며 학교를 다녔고, 매일 아침, 버스 종점에서 풍기는 매캐한 매연 연기를 마시면서 학교를 다녔다. 가끔 25번 버스를 타거나 때론 놓치거나 하는 꿈을 꿨다. 하지만 나의 최애 버스는 25번이 아니었다.


사실 중학교 때까지 걸어서 통학했으니 버스를 매일 만날 일이 드물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버스로 40분 거리에 있는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버스와 더욱 친해졌다. 8번 버스는 삼선교와 성대, 창경궁, 그리고 안국동을 잇는 버스였다. 당시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있는 곳엔 8번 버스가 다녔다. 다른 학교 애들이 다 내리고 나면, 그제서야 제일 마지막에 우리 학교 학생들이 내린다. 교복을 입고 있어 누가 어떤 학교를 다니는지 딱 봐도 확인 가능했다. 우리 집에서 30분이 채 못 되는 거리에 8번 버스 정류장이 있다. 7시 30분만 넘으면 바로 만원 버스가 된다. 그래서 나는 7시 10분경에 버스를 타기 위해 아침마다 서둘렀다. 만원 버스라고 타게 되면, s고 성추행범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의 아우라는 멀리서도 느껴졌다. 두려움에 당해도 큰 소리도 못치고(큰소리가 나지도 않았던), 꼼짝없이 갇힌 버스 안에서 당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왜 용기 내 저항하지 못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사춘기 소녀에겐 힘들었을 것이다.


강남을 갈 때 정릉에 사는 친구들과 만나 710번을 이용했다. 그 버스를 타고 코엑스에서 열렸던 서울 도서전에 갔었다. 그곳에서 엄청나게 길고 높은 에스컬레이터를 만나 후들후들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획일화된 고층 건물들이 마냥 어색했던 시절이다. 여의도 광장으로 자전거를 타러 갔을 때는 그때도 정릉 쪽 친구들을 만나 3번 버스를 이용했다. 당시 나는 자전거를 타지 못했는데 친구들 틈에서 배워보려 했지만 단시간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가르쳐준 강사마저도 나를 포기했다. 태어날 때 운동신경을 하나 빼놓고 태어난 건지 운동 관련한 모든 게 젬병이었다.


유일하게 나의 노력에 대가로 체육 시간, 높은 점수를 받았던 때가 딱 한 번 있었다. 일요일 아침, 혜영이와 만나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 연습을 했다. 30초에 15개를 골에 넣은 거였던가. 당시 우리는 갑자기 승부욕이 발생했다. 골대에 골이 들어가는 쾌감에 빠져버린 것이다. 일요일 아침 8시에 8번 버스를 타고, 나는 학교에 갔다. 종로에 살던 혜영이와 연습을 했다. 아침 공기와 약간의 땀 냄새가 나를 정화시켜줬다. 그렇게 딱 연습을 마치면, 각자가 타고 온 버스를 타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일요일 아침, 명작 만화나 드라마를 포기하고, 우리가 선택한 건 농구였다. 각자 30초에 나는 14개, 혜영이는 15개에 성공하면서 상위권의 점수를 획득했다.


고3 시절, 늦은 밤까지 학교 근처 정독 도서관에서 친구들과 공부를 했다. 도서관이 아니면, 학교 자습실에서 늦은 시간까지 헤맸던 우리들. 그때도 어김없이 8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퇴근 버스에 오르며 빈자리 하나 없이 빼곡한 버스에 서서 차창 밖을 바라본다. 버스 불빛과 가로등 불이 교차하는 고가도로를 지나 목적지에 도착한다. 나에게 8번 버스는 서울 어디서 만나듯 내게 안도감을 선사해 주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낯설지라도 저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집에 갈 수 있으니까.


수능 시험을 망치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학교에서의 시간은 마치 개와 늑대의 시간(좀 오버 긴하다 ㅋㅋㅋ)이다. 점수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모두 동일한 감정이다. 하지만 새벽이 지나 수능 점수가 나오면, 우리는 각자의 길로 처참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점수 나오기 직전, 학교에서는 시간을 때울 뭔가가 필요하다. 그날은 국립현충원에 갔던 날이다. 시험을 보고 난 후, 혜영이와 나는 마음이 좀 그랬다. 현충원에서 빠져나와 우리는 서울을 종단했다. 동작대교인지 한강철교인지 어떤 다리를 지나 위로 직진했다. 버스가 다니지만, 그때만큼은 버스를 외면했다. 버스에 올라타는 게 마치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에게 하는 자책을 몸으로 실천했다. 몇 시간을 걸었다. 둘 다 힘들 때 잠깐 멈춰서 한 마디씩 했다.


"우리 그냥 버스 탈까?"


하지만 둘은 다시 걸었다. 그리고 종로에서 혜영이와 헤어졌다. 나는 좀 더 걸었던 것 같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완벽하게 복원된 기억은 아니지만, 돈암동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온몸이 뻐근했고, 다리를 후들댔다. 어쩜 재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죄책감을 몸으로 대신했던 시절이다. 마치 수행하듯 고행의 길을 자처한 것이라고나 할까.


버스를 보내고 계속 걸었던 우리들에게 버스는 얼른 타라고 했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서도 버스는 왔다. 버스에 꾸역꾸역 타는 사람들을 보면서,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밥을 먹고 배를 채워 일하던 어른들의 시간도 상상한다. 몸으로 일하는 서울 변두리 노동자의 삶이 버스에 있었고, 생에 첫 나락 속으로 빠졌다고 믿었던 아이들도 버스에 오른다. 아기의 울음소리와 노인의 지팡이도 버스에 꾸역꾸역 오른다.


더 이상 소통 불가능한 서울 버스 노선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10대 추억의 많은 지분들이 증발했다고. 고체 상태인 드라이아이스가 기화를 통해 자신의 몸을 포기하는 것처럼 버스는 타의에 의해 자신의 징표를 버리고 사라졌다. 비슷한 노선을 다니는 버스가 있을 뿐 그때 그 시절은 이미 떠났다. 그리고 2004년 이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더불어 나의 추억들도 기화했고, 형체를 찾을 수 없게 됐다. 그렇게 살다 보면, 하나씩 세월에 기억을 내어주는 때가 온다. 나는 팔다리가 잘렸다. 하지만 그 환지통으로 한동안 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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