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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Aug 14. 2020

짐작 가능한 그녀의 세계 그리고 언어

고 허수경 시인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읽다가


2018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허수경 시인. 독일에서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 지도 교수와 결혼해 독일에서 자리를 잡았다. 독일에서도 시와 에세이, 소설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다.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을 읽다가 그녀의 모국어 대한 그리움이 절절했는데. 타국에서도 모국어가 고팠던 그녀의 삶은 그녀의 시 세계 전반에 깔려있다.



한 시절, 그녀의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특히 좋아했다.



불취불귀(不醉不歸)


                            - 허수경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은 2011년에 나왔던 시집이다. 울렁대던 그녀의 목소리를 붙잡고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녀의 어투를 많이 따라 했었다. 특히 종결어미로 '~~ 던가'를 종종 글에 담았는데, 그 기원을 따지고 보면, 그녀의 시가 물 흐르듯 내게 스며든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모국어를 들을 수 없는 삶에 대해 종종 상상했다. 고향이라는 어원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움과 외로움, 서글픔을 글로 표현해내며 고대 유적들 사이를 누볐을 그녀의 생을 떠올렸다. 그녀의 전공 분야인 고대 근동은 세계 문명의 시작점인 메소포타미아(이라크, 시리아 부근), 고대 이집트와 이란, 아나톨리아(터키), 시리아와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을 포괄하는 지역(내가 선망했던 여행지들)이다. 메마른 땅에 숨겨진, 모래 먼지 아래 숨겨진 문명들이 하나씩 얼굴을 드러낼 때마다 시를 쓰지 않았을까. 그녀에게 시란 낯익은 감정들이 낯선 표현으로 만들어진 작은 세계, 그 세계들이 모여 문명을 만들고, 나아가 문학이란 이름으로 단단히 뿌리 내려진 게 아닐까.




슬픔의 난민


                     허수경



가녀린 손가락을 가진 별 같은 독서의 시절은 왔다 세계를 읽다보면 이건 슬픔으로 가득 찬 배고픔으로 억울한 난민의 역사 같아서 빛 속에서 나던 냄새를 맡으며 세계를 여행하는 저 어린 새들에게 아버지 아버지 날 버리세요 하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아직 죽지 않는 신들 가운데 제일로 다정하던 노을이라는 신이 나에게 달력을 내밀었을 때 달력에는 술잔만 가득했고 아프리카를 떠나서 막 유럽의 해변으로 들어오던 작은 배의 난간을 붙들고 어떤 남자가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데리고 가달라고 가달라고 울부짖었다



저 지중해에 비명이 없었다면 대륙의 살갗에 거친 몸을 들이대는 배들은 아마도 지중해에서 영혼을 팔았을 터, 저 남해에 소금처럼 아스라하게 널려 있는 섬이 없었다면 우리는 울음을 몰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슬픔은 언제나 가늘게 떨린다 늙은 슬픔만큼이나 가늘게 떨면서 삭아내리는 것도 없다 아주 젊은 슬픔은 격렬하나 가늘게 떨리면서 개벽에 엎드려 있다가 해가 나오면 말라 죽는다 아주 오랫동안 슬픔은 가을의 바다 장미처럼 오랫동안 말라가는 하늘 아래 서있다 팔랑거리는 잠자리의 날개가 가늘게 공기의 핏줄을 건드리고 갈 때 지는 장미의 그늘 아래 그렇게 조금은 나이가 더 든 슬픔이 쪼그려 있다가 밥하러 들어갔다 남자의 비명이 아프리카에서 넘어들어왔다 해맑은 밥에 따뜻한 눈물 한 방울 어려 있다 누군가 나에게 건네주는 난민의 일기장 같다




'슬픔은 언제나 가늘게 떨린다'라는 시구 앞에 무너진다. 슬픔은, 오랜 슬픔은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어쩌면 생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에너지와 같다. 슬픔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라는 건 그만큼 슬픔이 크다는 뜻이며, 슬픔이 크다는 건 슬픔을 그 어떤 감정보다 크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다가, 누군가의 생을 엿보다가, 타인의 눈을 훔쳐 읽다가 내가 간혹 마주했던 어떤 슬픔들이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서 일정한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하나의 슬픔의 강을 건너면, 또 다른 슬픔의 강이 기다리고 있듯, 우리는 슬픔의 문턱 앞에서 매번 서성대고 아파하지만, 요동치는 물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만다. 그것이 언어가 될 수도 있고, 몸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허수경 시인에게 슬픔이란, 타인의 슬픔마저도 자신의 아픔으로 치환할 수 있는, 드넓은 대지 곧 그녀가 누비고 다녔던 메소포타미아 평원이나 아나톨리아 반도 어디쯤 슴겨진 영혼들의 숨결이 아닐까. 그녀의 품에서 나는 슬픔을 만끽하고 눈물을 흘린다. 내가 혼연의 힘을 다해 토해냈던 그 에너지들이 순식간에 그녀 안에서 사라진다. 그녀는 모래바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유적들을 순례했고, 유적들이 세상 속으로 알려질 때 그녀는 다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녀의 생이 내게서 아득해진 순간이다.





(중략)


자연 앞에서 식욕을 느낄 때 나는 생물이다



(중략)

시간들은 역사에 들어가지 않는 파편, 파편이 시간 속에 일그러진 자연, 위장 속에 든 저 토마토 밭, 그러나, 여자들이 울면서 바다를 지나갈 때 오 신이여,라고 울면서 걸어가던 남자들은 산으로 들어간다 살인자가 되어 마을로 돌아와 검은 죽을 마실 때, 문득 당신은 물었다 부모가 누구요? 나의 고향은 영원한 실업자들만이 살던 나라지요 적은 양식으로 끼니를 잇다가 북아프리카 사막 지역으로 용병을 하러 떠나기도 했던 전 세기의 남자들이 먹는 검은 죽을 꿇이는 불이죠


나는 그 죽 안에 든 짐승의 고기 안에서 그 고기 안에 든 풀을 본다 선잠이 든 여신이 가랑이를 벌리고 누워 저 많은 물결들을 낳고 있다 그때마다 저 만신전에서 쫓겨난 것들의 목을 눌러죽이는 유조선이 내 생활이지요 그리고 그건 인생을 노래하던 작은 악몽이었어요



이런 날 부르는 노래는 운동가들이다 존재의 발생을 보고 있던 것처럼 노래는 비장하고 노래가 비장할수록 존재의 탄생이 남루해지던 가을에 첫 성교를 했던 아이들에게 빛은 어떤 말의 그림자를 주었을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중에서  '바다 곁에서의 악몽' 중 발췌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식욕을 떠올리던 시인. 시인에게 생은 전반적으로 악몽이었을까? 행복과는 거리를 둔, 어떤 생의 이질감들이 악몽으로 표현된 게 아닐까.


생과 내가 불일치하다고 느낄 때 나는 악몽을 꾼다. 나의 꿈이 나의 내면 어딘가에서 마찰을 일으킨다. 꿈속에서 어떤 각인을 통해 꿈과 현실을 구분한다. 악몽이 현실과 유사한 상을 그려낼 때 처절한 생의 밑바닥을 흩고 간다. 낯선 상황에서 익숙한 감정을 끌어내는 그녀에게 시는 생과의 유일한 소통 창구가 아니었을까. 독자는 결국 그녀의 언어를 맹인처럼 더듬다 짐작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그녀의 시는 짐작 가능한 생의 이면이다. 그녀의 감정이 나와 결이 많이 다르지 않음을 시를 통해 짐작한다. 그녀의 관심과 내 관심이 저 밑바닥 너머 어디였음을 짐작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의 시가 모국어처럼 친숙하다. 내게 짐작 가능한 어떤 세계이다. 그 짐작이 틀릴 수 있지만, 나는 그 짐작을 통해 생을 이어간다. 그녀의 시가, 그녀의 슬픔이, 그녀의 생각이 내게 생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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