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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Aug 17. 2020

누구를 위한 광장일까?

2008년 광장의 기억 그리고 2020년 지금 우리는

2008년부터 2009년은 삶의 부조리가 내 일상을 가격한 해이다. 내 심장에 가장 큰 균열을 남긴 해로도 기억한다. 2008년 5월부터 근 한 달간 나는 광장에서 밤을 새웠다. 광장이라는 소통의 공간에서 나는 불가능한 소통을 꿈꿨던 걸까. 꿈꿨다기보단 분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나의 서툰 광기라 칭하겠다. 그렇게 나는 미처 버릴지도 모를 세상에 분노를 쏟았다. 나의 입은 거칠어지고, 평생 입에도 담지 않았던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광우병 사태의 끝자락이었을 것이다. 일단 명박산성에 나는 기가 차 할 말을 잃었고, 친구와 거리를 배회하다 시위대를 만났고, 그곳에서 학교 후배들도 만났다. 까마득한 후배들이지만 그들은 과방에서 깃발을 직접 제작해 연합 시위에 합류했다. 그렇게 우리는 물 흐르듯 시위를 함께 했다. 길 가다 만난 아는 사람들로 인해 무리는 점점 더 커졌다. 오랜만에 만난 과 선배와 후배들, 같은 직장에서 일을 했던 나의 지인까지. 우리의 분노는 격정적이었지만, 광우병 시위는 분노를 표출하기보단 하나의 축제 같았다. 그랬었다. 그때까지는.



푸른 기와집에서 보기엔 시민들의 자유로운 시위 풍경이 낯설었을 것이다. 화염병이 오가는 것도 아니고, 돌멩이나 보도블록을 깨서 전경을 향해 던지는 시민들도 없었다. 오히려 본인의 두려움을 컨테이너 박스로 표출하면서 (본인이 생각하기엔 절대) 불가해한 시민들의 행보에 장벽을 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두려운 자가 먼저 공격을 한다. 공포심이 극에 달하면, 먼저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킨다. 이는 패배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패배는 오랜 후에 결정 나기도 한다.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그 시대를, 그를.



광장에 오면, 명박산성에서 인증샷을 찍고 광장을 둘러본다. 저쪽 한편에서 인터넷으로 방송을 하는 한 시사평론가가 보인다. 그도 한때 광장으로 향한 적이 있었다 생각하니 웃음만 나온다. 당시 광장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니까. 단지 그때는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광장은 자유 그 자체였다고 회고한다. 시위대가 몰리면, 떡이나 김밥을 파는 노점상 아줌마들이 매캐한 연기 속에서 장사를 하던 시절과는 다르다. 광장 주변엔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주말이면 공연도 있었고, 나는 혼자 또는 친구와 동행해 광장을 돌아다녔다. 그 마지막은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해장술을 마시며 주말을 마감했다. 나의 일과는 단출했지만, 메시지는 분명했다.



5월부터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친구와 나는 드디어 올 것이라는 소문에 귀를 기울였다. 청와대 저편으로 저벅저벅 뛰어오는듯한 전경부대들이, 그들의 기합 소리가 들렸다. 마치 폭탄을 장전한 탱크부대가 곧 닥칠 것 같은 기운이었다. 뭔가 터질 것 같았다. 6월 10일 민주 항쟁을 기념하던 그날이었던 것 같다.  오전 9시부터 강제진압에 나섰다. 나와 친구는 다음날을 기약하며 헤어지고 난 후 약 2시간 후였던 것 같다.



그날, 나는 끝까지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물대포는 그전에 이미 쏟아부었고, 우리는 물대포를 보면서 이 불가해한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분노의 2008년이 지났다.



그리고 2009년 5월 23일, 전직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다시 이해불가한 이 시대를 나는 결코 인정할 수 없음을 알았다. 내 젊은 시절에 오점과도 같던 시대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미궁에 빠졌다. 나는 서거 소식을 듣고, 바로 덕수궁으로 향했다. 전날, 노량진에서 시대 한탄을 하던 우생을 또 만났다. 우리는 덕수궁 지하보도에서 지상으로 진입하는 것이 힘들었다. 막고 서있는 전경들에게 소리도 쳤다. 시민들은 흥분했고, 우리는 그 시절에 애통해했다.



그 이후, 김제동의 사회로 진행된 노제에 참석했다. 그때는 나 혼자였다. 혼자였지만, 터키 여행 때 만난 혜은이를 만났다. 누구든 그냥 집에 갇혀있을 수 없었다. 광장엔 서글픈 햇볕이 찬란하게 빛났다. 눈이 부셔 무대를 바라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훌쩍이고, 또 누군가는 멍하게 볕에 몸을 맡기던 그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미집이 카메라를 흩고 가던 뉴스 영상처럼 나의 시선도 지미집처럼 조금은 높게 노재를 내려다 본 기분이었다.



2020년 8월 15일, 광장에서 일어난 폭력과 행패, 억지, 비이성적 행태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다. 광장이란 분명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다. 누구에게나 열렸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게 용인될 순 없다. 광장이 다시 원래 기능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코로나19가 아니면 이번 주 화요일부터 둘째를 짧게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했던, 나의 작은 소망을 다시 고이 접었다. 질병이 공포가 아니라, 질병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더 공포스럽다. 그들이 제조하고 있는 공포심, 그 공포심으로 장사하고 싶은 이들에겐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나는 더이상 두렵지 않다. 공포심, 불가해한 비현실 앞에 주저앉아 울던 시절도 이제는 비현실적인 풍경 속으로 흘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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