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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Aug 21. 2020

90년대 교련 수업과 그 시절, 여고생의 기분

교련 시간에, 둘씩 짝을 지어서 머리에 붕대를 감는 걸 했어요. 실기시험을 봤어요, 그걸로. 그때 저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걔가 제 머리에 붕대를 감았는데요. 한참 붕대를 감다가 걔가 갑자기 어? 그러는 거예요. 어? 어? 왜 이러지? 알고 보니 붕대가 모자랐던 거예요.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했더라? 묶어서 매듭을 지었나, 아니면 밑으로 접어 넣었나, 둘 중 하나였는데. 아무튼 그걸 할 수가 없었나 봐요. 붕대가 갑자기 콱 조여들어서 제가 악! 소리를 질렀더니, 세연이가 아 어떡해, 미안해. 이러는 거예요. 모자라니까 당기면 될 줄 알고 당겼나 봐요.

- 윤이형 작가의 소설 <붕대 감기> 중에서


윤이형 작가의 소설을 읽다가 마들렌 한 박스를 씹어 먹은 건처럼, 오랜 기억들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때는 바야흐로 아~ 하 수상하던 시절로 거슬러올라 90년대 중반, 고등학교 교련 시간. 당시 우리들은 수업 중에 붕대를 감았다. 부목을 대고 팔목을 감고, 종아리를 감아대고, 깁스 형태로 팔목을 감았다. 남자 고등학교 교실에선 제식 훈련이,  여학생들은 전쟁 시 필요한 붕대 감기를 실전으로 배우던 시절이다. 90년대 정권이 바뀐 이후에도, 군사정권의 잔재가 교실 속에서 펼쳐지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삼각건으로 시작해 붕대 감기를 실천하면서 우리는 쉬는 시간, 틈틈이 서로에게 팔과 다리를 내어주며 실습을 했다.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울 수 있는 붕대감기. 무엇보다 순서가 중요하다. 감다가 중간에 한 번 엉키면, 마무리가 불가능하다. 붕대가 짧아져 매듭을 매기 힘든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붕대를 차분하게 정돈시켜 내 몸에 착화시키는 작업은 꽤나 까다롭다. 


우리는 서로에게 실습 마네킹이 되어 몇 분간 정지 상태로 있어야 한다. 앉아있는 입장에선 지금처럼 스마트 폰을 보며 킬링 타임을 보낼 수도 없었고, 몸이 고정시켜야 한다. 미용실에서 구루프로 머리를 말듯이 얌전히 있어야 한다. 다만, 그 와중에도 입을 쉬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은근히 수업 시간은 매우 시끄럽다. 선생님은 입으로 붕대 마냐며 조용히 하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보통은 다들 앉아서 거울을 들고 있었다. 뒤쪽이 잘 감겼는지 옆모습은 어떤지 가늠한다. 


흔하디 흔한 인문계 여고 교실 수업의 풍경 중 한 프레임에 들어가는 교련 시간. 수업의 시작은 바야흐로 군사 정권하였던 1969년. 이후 교련 교육은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서 계속 유지되었다. 당시는 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에서도 교련 수업이 있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후 교련 수업은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1988년 말, 대학생 교련이 폐지되었고, 1997년에는 선택 과목으로 지정돼 대부분의 학교에서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2011년에는 '안전과 건강'이란 교과목으로 바꿔, 이 역시 선택 과목이었으니.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과거 군사정권의 유몰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내게 교련 수업이란, 나이 먹은 학생들의 전유물이었다. 내가 이 수업을 받는다는 건 까마득한 미래의 얘기 같았다. 고등학생이었던 오빠가 교련복을 입고 학교에 가던 기억, 집에 와서 수업 중 배운 제식 훈련을 시연하며 설명하던 기억들과 큰언니와 작은 언니를 위해 실습용 마네킹이 되었던 나를 떠올렸다. 이후 직접 수업을 통해 접한 교련 수업은 국영수가 아닌 입시 열외 과목이다라는 인식 정도이다. 그 수업에서 내가 기억하는 건 붕대 감다 종 치던 기억 정도가 다였다.


다만, 교련 선생님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가정, 가사 쪽 과목도 이수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랜만에 기억의 회로를 되돌리니 잊었던 이름도 떠올랐다. 김** 선생님. (단순 기억력만 뛰어난...) 지루한 수업 내용을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졸지 않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선생님이셨다. 본인 스스로도 90년대 교련 수업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안고 계신 게 아닌가 싶었다. 하여, 문제를 어렵게 내지 않을 테니, 조금만 공부해서 점수 잘 받아 가라 식으로 나름의 배려를 해주셨다. ㅎㅎㅎㅎ



여름이 이제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날따라 뜨거운 여름 바람이 교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사우나 방을 방불케 하는 열풍은 이내 인간의 욕구를 자극한다. 사실 고2쯤 되면 여고의 여학생들은 그 어떤 눈치도 보지 않는다. 졸리면 졸고, 배고프면 먹는다. 따라서 식곤증이라는 자연의 생리 앞에 순응하고 만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누군가가 수면제를 교실 위에서 비처럼 뿌려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모두들 졸렸는데 다행히 국영수가 아니라 맘 편하게 잠에 빠져드는 아이들. 입시의 부담감도 적은 과목이니 다들 더 안심한 걸까? 선생님은 화를 내지고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너무너무 졸릴 때... 얼마나 졸리면 필통도 졸리다고 쓰여있네"


갑자기 내 필통에 새겨진 글귀를 읽으며 졸음에 대한 썰을 풀기 시작한 선생님. 선생님은 곁눈질로 슬슬 눈치를 보시는 것 같았다.


"얼마나 졸리길래 필통도 졸리다니. 여기 다들 졸고 있어"


반응이 없으면 어떨까 눈치를 보시는 선생님 앞에서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웃음으로 응대했다. 뒷자리 조는 아이들은 미동도 없지만, 앞자리인 나는 그때 당시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나 할까? 갑자기 생겨난 의무감으로 머쓱해할 선생님에게 작은 반응이라도 보여야 했다. 선생님은 눈치를 보면서 목소리를 키워갔다. 깨는 아이들이 있었는지 어땠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다만, 나는 졸지 않았고, 눈을 크게 뜨고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도 수업을 이어갔다.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깨어있는 시간. 양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선생님의 수업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아마도 선생님은 끝나면서 5교시 수업을 힘들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름날의 5교시 수업은 여고생들에겐 학교 앞 분식집 떡볶이만큼이나 참기 힘든 식곤증이라는 유혹이 있다. 그 유혹 앞에서 우리는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하거나 아예 대놓고 쓰러져 잠에 빠진다. 자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했던 쉬는 시간. 10분이라는 막간을 이용해 매점까지 초고속으로 달려가 비닐팩에 담긴 커피우유와 빵을 사 가지고 와서 또 배를 채우고, 다시 식곤증에 빠져든다. 먹고, 졸다가, 수업이 끝난 교과서엔 지렁이들이 지나간 흔적들로 가득했다. 강렬하진 않지만, 온 땅속으로 헤매다 온 지렁이는 잠들 때만 나타난다. 우리 안의 지렁이들이 발현되는 순간이 바로 졸음의 신이 강림하는 때이다. 신을 맞이하는 우리는 경건한 자세로 일관한다. 가끔 고개를 심하게 끄덕이며 헤드뱅잉을 하는 아이도 있다. 신을 숭배할 때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이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면, 동시에 졸음의 신도 사라진다. 신이 사라진 이후, 우리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방과 후, 우린 어디로 가서 뭘 먹을까? 고민한다. 학교 앞 왕자 분식집의 플라스틱 냉면기 라면을 먹을 것인가, 정독도서관에 가서 자판기 라면을 먹을지 방과 후 행보에 따라 갈린다. 그리고 당시 우리가 열망했던 시절의 연예인들이 대화 도중 수시로 등장한다. 부부 분식의 밍밍한 떡볶이를 먹으면서, 제일 분식의 정통 무말랭이 만두를 먹으면서도 우리들의 대화는 계속됐다. 분식점 옆 중고서점에서 팔던 중고 연예 잡지에 열광하던 시절, 우리들의 낭랑 18세는 그렇게 흘러갔다.  


( 그 붕대는 대학 입학 후 종아리 압박을 위한 다이어트용 붕대로 활용됐다. 소금을 첨가해 압박하는 방식이었으나, 그 효과는 잘 모르겠다. 다만 피가 안 통해 엄청 다리가 저렸던 기억이...)


현재 고3인 조카에게 이 얘기를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깜짝 놀라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만 나오는 추억이다. 웃게 해 준 추억의 한 페이지가 있다니 다행이다. 끝으로 그 시절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악수를 건네고 싶다. 무사통과해줘서 고맙다고. 고맙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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