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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Aug 24. 2020

마스크가 불편하다는 그대에게

멀고도 먼 코로나 종식을 위해 버려야할 우리끼리. 끼리끼리 

코로나가 창궐 중인 주말, 갑자기 잡힌 회의 때문에 부득이하게 외출을 했다. 두 아이는 언니네에 맡기고 차를 다고 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로 무장한 채 무심하게 걷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 중 안 쓴 이들이 보인다. 50~60대의 남성, 70대 이상의 노인, 20대 남자. 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걷는다. 본인의 주거지에서 멀지 않은 곳이고, 잠깐의 외출이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본인들은 괜찮지만, 타인들에겐 불안감과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걸 모르나 보다.


주말이라 사무실 엘리베이터도 한산하다. 도착하니 이미 부장이라 불리는 그분들이 앉아계셨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때부터 불안 불안했다. 요즘 국회의원들은 인사법을 바꿨다고 한다. 악수를 청하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안부를 묻지 않는다는 건데 이분은 그런 개념을 탑재하고 있진 않은 모양이다.


그들은 물론 실내이고. 실내에는 회의 참석자들만 약간 명이 모인 거라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벗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나의 건강을 챙겨주지 않으며, 내가 나를 스스로 보호하는 차원에서 실내외 어디서든 마스크 착용은 내게 필수였다.


프로덕션 대표는 마스크를 쓴 나를 보고, 본인 방에서 마스크를 들고 와 쓸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도 마스크를 써야 서로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건가?"


이때 악수를 청했던 그분이 볼맨 소리를 한다.


"우리끼린 괜찮지 않아? 마스크를 꼭 써야 돼?"


우리끼리라니. 언제 봤다고 우리끼리인가. 그 우리끼리라는 생각 때문에 코로나가 종식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창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그분은 끝까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크게 내색을 하지 않았다. (무력으로 벗으라고 강요하지 않은거니 그나마 다행인건가?)


오늘부터 서울시에서는 실내외 마스크 의무화를 시행한다고 한다. 실내 다중 시설에서도 마스크를 벗으면 안 되며 어길 경우, 서울시에서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한다. 마스크를  벗지 않는 게 아직도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꼰대들에게 나의 꼿꼿한 마스크 착용은 불편하다. 하지만 이제는 마스크 착용이 아닌, 마스크 미착용이 문제가 되는 것. 마스크 좀 썼다고 해서 예의에 어긋다나도 볼 수 없다. 오히려 나이 불몬하고 안쓰는게 무례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여전히 술잔을 돌리고, 악수를 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침을 튀겨가며 얘기할 것이다. 무엇이 상대에 대한 예의인지 다시 한번 돌이켜봐야 한다. 


아이들을 데리러 언니네 집에 갔다. 저녁으로 보쌈을 시켰는데 앞접시에 덜어먹지 않고, 즉시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달려드는 형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코로나가 종식되기 위해 앞으로 우리가, 인간이 노력해야 할 것들이 산재에 널려있음을 깨달았다.


예민한 나는 매번 외출이 불편할 것이고, 지나가는 타인을 경계할 것이다. 극도의 예민은 건강을 해치지만, 적당한 거리감 유지와 상대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괜찮으니 남들도 괜찮다고 생각하진 말아주길.


오늘도 나는 회의를 가야 한다. 남편은 지하철 말고 택시를 타라고 한다. 나는 오히려 택시가 불안하다. 택시에는 여러 사람이 드나든다. 문을 열고 탄다한들 둘 밖에 없는데 둘 중 하나가 걸린 상태라면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기사를 보니 지하철 감염은 지금까지 없다고 하는데(깜깜이 무증상 환자가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지하철을 탈 것이다. 좀 더 발품을 팔아 사람이 최대한 없는 곳에서 자리를 잡고 조용히 내릴 때까지 그 어떤 통화도 하지 않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다가 내릴 것이다.


(그나저나 10년 전에 만났던 프로덕션 대표. 그때는 까칠했고, 안절부절했고, 늘 예민한 표정으로 주변을 응시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여유가 생긴걸까 표정이 좀더 밝아진 느낌이다. 마스크를 쓸까말까 고민하는 것도 그나마 상대를 보며 행동수정을 할 의지가 있다는 것도 그렇고 완벽한 꼰대의 길을 걷고 있진 않은 것같다.)


코로나로 인해 참 많은 것이 변했다. 

예의의 기준까지 바꿔버린 코로나의 위력에 다시 한번 무릎을 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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