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절기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델리러브 Sep 11. 2020

기억하는 한, 우리는 서로에게 존재한다

길게 보는 관계일수록 마음으로 응원할수밖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나의 상황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으나,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나의 행동반경이 넓었고, 그들과 내가 유사한 근거지에서 활동하고 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나의 행동반경이 여의도로 넘어갔을 때이다. 그때쯤 그도 직장을 그만두고 야인처럼 살다가 아는 분과 홍대에서 작은 프로덕션을 하던 시절이다. 나는 여의도로 넘어가면서, 친구들과 만나는 장소를 아예 홍대로 정착했다. 끝나자마자 택시 타고 서강대교를 넘어 상수동으로 향하던 그 길. 홍대로 가는 가장 저렴한 길이다. 택시가 헤매지 않게 항상 여기서 좌회전해야 한다며 뒤에서 택시 기사님을 감시하던 그때였다. 그와 내가 유사 직종이었고, 근거지고 홍대였으니 우리는 우연히 길 가다가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높다.



친구들과 홍대 정문으로 향하던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덩치는 산만한 사람이 스쿠터를 타고 지나가다 멈춘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본다. 그의 외모는 멀리 길 가다도 멈출 정도로 눈에 띄다. 이름도 범상치 않다. 뭐하나 범상치 않던 그가 나를 알아본다. 우리는 예전에도 어디선가 마주친 적이 있었다.



"또 만났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상용이 형이랑 이 근방에서 일을 해. 상용이 형 사촌이 최성국인데 그래서 오늘 여기에 와서..."



굳이 나는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다 그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자신의 근황을 내게 순식간에 투척하고 사라졌다. 사실 그의 TMI로 접근하는 방식의 대화에 익숙하다. 묻지 않아도 대답하는 방식이다.



그의 꿈은 소설가이다. k대 국문과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했고, 필명을 김희선으로 정해 방송 대본을 쓰고, 내게 돈을 입금한 후, 그 돈으로 팀들과 술을 마시자고 검은 제안을 했던 인물이다. 술자리에서 대화 도중 했던 얘기들이 선명하다.



"들어봐, 내가 시나리오로 쓰려고 하는데 제목은 '사시미 랜드'야."

"사시미? 그 사시미요?"

"사시미랜드에는 늙은 여자들만 살아. 어느 날, 그 섬에 우연히 남자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일이야"

"왜 사시미랜드예요"

"협박용이지 남자는 한 번 이 섬에 발을 들이면, 못 나가. 못 나가고, 나랑 해야 되고. 으흐흐흐흐흐흐"



그때 그 얘기를 들었던 팀원들 모두 재밌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는 흐뭇해했다.



그 후로 1년 후였나. 그가 탄식했다.



"먼저 쓴 놈이 장땡이야"



그렇다. 이 시나리오의 기본 골조가 영화'마파도'와 유사하다. 그는 마치 자신의 시나리오를 도둑맞은 것처럼 아쉬워했다. 창작의 기본은 일단 실행이라는 걸 얘기해 주는 예이다. 그 이후,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동남아를 전전하며 베트남 여자를 등쳐먹고(그 주변 사람들의 표현) 들어왔다는 것. 야인처럼 살던 그 흔적은 그의 팔뚝에 남아있다. 100킬로가 넘던 거구였던 그는 여행을 하면서 살이 많이 빠졌다. 홀쭉해져 이제 그의 팔뚝에 새겨진 '체 게바라'가 우리가 기억하는 '체 게바라'가 아니었다.


팔뚝을 늘리면서 얘기한다.


"원래는 이랬는데 눈이 쪼그라들었어. 게바라 눈 떠"



그 후 꽤 오랫동안 근황을 모른 채 살았다. 아쉽게 굿바이를 했던 체 게바라는 지금 그의 팔뚝에서 어떤 형체로 남아있을지 궁금했지만 굳이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다  7년 후였나? 여의도 금산빌딩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방송작가협회에서 하는 드라마 과정을 수료 중이라고 했다.



"내가 사실 소설로도 등단했어. 그래서 소설을 쓰고 있어. 방송 대본도 쓰고 있고, 요즘은 게임 시나리오 공모전 준비 중이야"

"바쁘시네요"



나는 당신이 등단을 했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요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우리는 매번 오고 가는 대화를 한 적이 없다. 나는 항상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여전히 다시 메인 스트립의 잡을 선택하지 않았다. 배회하고 떠돌고 있다. 놀랍게도 결혼해서 아이들도 낳았다고 한다. 홍대 곱창집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까지 골인하다니. 정착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는데 그도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본인을 닮은 남녀 쌍둥이들이다. 어른이 덜된 아빠는 두 아이들과 잘 논다. 아빠가 애이니 같이 노는 게 아닐까 싶다. 이후 제주가 고향인 와이프 따라 제주에 거주 중 있다.



그러다 재작년이었나? tv 다큐멘터리 스크롤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했다.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이름이다. 그는 작가 이름으로 올라가 있었고, 나는 뭔가 뭉클했다. 다큐는 제주 시장에 관한 내용이었다. 틈틈이 방송 대본을 쓰면서 돈을 벌고, 꿈도 쫓고 있는 그를 보면서 그도 어른이 되어가고 있구나 싶었다. 뭉클한 마음에 톡을 열어 근황을 물었다.



"방금 다큐 잘 봤어요. 제주도네요?"

"아는 후배가 해달라고 해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계속 대본 썼어."

"소설도 쓰고 계세요?"

"뭐든지 다 쓰지"

"건필하세요"

"그래 너도"



서로가 건필하길 하는 마음으로 짧은 대화를 마쳤다. 언제 다시 우리가 만날지 모르지만,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인연이다. 지속적인 만남을 하지 않지만, 한 시절을 같이 보낸 기억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는 존재.



기억하는 한, 우리는 서로에게 존재한다. 존재하기에 우리는 우연히 만나도 어색하지 않다. 관계란 매번 접촉을 통해 확장되는 거지만, 어느 순간, 그 관계도 풍선처럼 꺼지는 날이 온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장담할 수 없다. 다만, 기대할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울 여자를 꿈꿨던 그녀, 왕십리 연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