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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Aug 23. 2020

서울 여자를 꿈꿨던 그녀, 왕십리 연가

90년대 말, 왕십리를 추억하며

서울과 나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는 다분히 나의 기억이다. 그 거리. 그 동네, 그 가게들이 내 기억의 지분 속에서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에 따라 스토리의 편수가 정해진다. 언니네 집이 있는 왕십리는 아마도 5편 이상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내 기억 속의 왕십리는 친구의 자취방이 있던 1기 시절인 왕십리역 주변과 현재 언니가 살고 있는 왕십리역에서 가까운 마장동으로 나뉜다.



왕십리가 내게 직접적으로 다가왔던 건 단연 친구의 자취방 때문이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친해진 친구인데 그동안 그 친구가 데모하느라 수업을 등한시해서 자주 못 봤다. 그러다 3학년 때부터 소설 모임을 통해 가까워진 친구다. 당시 친구는 우리 과에서 소설을 잘 쓰는 톱클래스, 그중  랭킹 1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비한 나의 결과물에 비하면, 친구의 소설은 수려하고 깊이도 있고 멋졌다. 분량도 나를 비롯 다른 동기들과는 비교 불과했다.



어린 우리와 우리보다 먼저 성숙한 그녀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취였다. 나와  k는 그 친구에 비하면 너무 어렸다. 나는 부모가, k는 엄마가 있었다. 나는 언니 둘과 오빠가 있었고, k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들은 늘 근거리에 있었으므로, 우리에겐 고독의 시간이 적었다. 반면 그녀는 중학교 때부터 자취해왔던만큼 이니 고독의 세계에 진입해있던 것이다. 그녀의 당시 소설은 그 당시의 흔적, 그녀의 세계를 집약한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침입자가 들이닥쳤다.  그녀가 약간 취해 홀로 잠을 자던 그때, 누군가 반지하 창문을 열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와 한참을 쳐다보고 간 모양이다. 그녀는 기겁을 하고, 얼마 못가 같은 건물 2층으로 이사했다. 더 많은 지출을 하게 된 만큼 그녀는 좀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했다. 밤을 새워 시디를 굽는 작업을 했다. 나름 고소득 알바이나 몸이 힘들었다. 그래도 그녀는 버텼다.



우리는 그녀가 알바를 쉬는 날이면, 왕십리 자취방으로 놀러 갔다. 당시 동네엔 작은 시장이 있었다. 그곳의 계란 가게 청년이 참 참해 보인다는 그녀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장 보러 다니기도 했고, 계란 청년 네 계란도 몇 번 구입도 했다. 자취방 옆에 곰 호프는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진 못했지만, 친근한 동네의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왕십리는 점점 더 나에게 익숙한 동네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당시 닭고기, 닭고기를 외치며 허기진 자신의 상태를 시로 표현했다. "여긴 어딘가요, 서울 여자가 되고 싶었는데"... 허기진 나는 닭고기가 고프다는, 가게 문턱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군침만 흘린다는, 당시 자신의 상태를 처연하게 보여줬다. 그녀에게 들이닥친 허기는 물리적인 허기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쉽게 그 시를 덮어버릴 수 없었다.


한 번은 소설 숙제를 해야 하는데 k는 컴퓨터가 없어 왕십리 자취방에서 밤새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문이 잠기는 바람에 갇히는 사고가 발생했고, 다행히 그때 삐삐가 아닌 벽돌폰 시절이라 통화를 통해 겨우 구출된 적도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때는 촛불 켜고 우리끼리 시 낭송회를 하다가 종이에 불이 붙어 큰일 치를 뻔도 했고, 서로 밤새 얘기하다 눈물과 함께 격정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



이 중심에 왕십리가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자취방이 있다. 작은방엔 침대가 놓여있고, 책꽂이 하나와 컴퓨터 테이블, 의자가 있었다. 부엌은 분리돼 문밖으로 신발을 신어야 하는 구조이다. 우리는 그 작은 자취방이 어느 순간 편안해졌다. 그녀의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은 헤진 슬리퍼처럼 익숙해서 도저히 버릴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관계가 되었다.



처음 왕십리를 입성한 기억은 흐릿하지만, 선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나왔는지 그 종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분명 그녀는 이사를 갔을 것이고, 그곳이 왕십리와는 정반대 편에 있는 화곡동 까치산역쯤이었다는 것. 그 뒤로 왕십리 지역은 재개발에 들어갔고, 더 이상 내가 알던 왕십리는 없다는 것쯤은 기억한다. 그런데 내가 언제 왕십리를 기억에서 놓아버렸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분명 한때 그 동네를 토박이처럼 익숙해했는데, 마지막으로 그 집을 나온, 그때는 불분명하다.



어디로 증발했을까?

나의 기억은. 나의 왕십리는. 그때 그 시절은.



재개발로 개편된 서울의 왕십리를 지나다 문득 떠올린다

왕십리 5번 출구, 그때 그 출구 쪽에 살던 이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나는 놓아준 적이 없는데, 너는 어디로 사라진 거니?

이름도 애틋한 왕십리. 왕, 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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