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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Sep 13. 2020

글쓰기란 나의 각을 세우는 것

세상과 불화를 겪고 있다는 건 불운한 일이야

나는 일을 할 때 자유도가 떨어지면, 능률이 배 이상 하락하는 성향을 지녔다. 간섭이 많은 환경에서 나의 뇌는 더 이상 가동을 멈춘다. 이 멈춤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마치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태풍 앞에서 올 스톱되는 위태로운 순간처럼 한 순간 모든 걸 그릇 치게 한다.



근래 나의 의도가 절대 반영될 수 없는 작업을 이뤄졌다. 문제가 있다고 항변해도 막무가내식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이 있었고, 문제가 있어도 남일 인양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다시 작업을 했고, 다시 작업을 했지만, 여전히 우려하는 주변의 목소리 덕에 나의 부족한 작업물은 어디 가나 찬밥 신세를 겪고 있다. 남편은 그런 내가 보기에 답답한 모양이다. 이런 작업물이 나오는걸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지만, 그의 온 신경은 결과에만 머물러있었다.



"그냥 지난 일은 이제 잊어"

"어떻게 잊어. 지난 일이 아니야. 나한텐 이제 시작이야"

"어쨌든 1, 2편이 무사히 잘 끝내는 게 관건이야"

"잊긴 어떻게 잊어. 이번 주 내내 석고대죄해야 하는 사람처럼 입 다물고 있어야 하는데"



본인은 일한다고 그냥 가버리면 끝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한 번 외출하려면 밥도, 반찬도 준비해야 하고, 밀린 집안일도 해야 한다. 그냥 가라는 말 믿고 그냥 가면, 아이들은 계속 외식을 해야 하고, 당장 내일 입을 옷들이 없다.



그런데 그제 남편의 한 마디에  그 자리에서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무슨 생각으로 일을 한다고 한 거야?"

"몰라서 물어?"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물어보지도 못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는 말이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구나를 절감했다. 애 엄마가 아무 생각 없이 덥석 일을 잡으면, 이런 대참사가 벌어지는 건가? 나의 제안에 대해 이건 이래서 안 돼, 이건 예산이 안 돼, 이건 시간이 없어를 입에 달고 다니던 남편이다.(이번 프로젝트는 남편과 함께 하는 작업)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몰라서 묻는가. 경제적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악착같이 버는 거 말곤 답이 없는데, 그걸 몰라서 그렇게 순진한 질문을 내게 던진 건가.



사회생활이란 건, 사회생활에서의 일이라는 건, 과정이 중요치 않다. 최대치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 달려야 한다. 결과물에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내가 하는 건데, 밑그림을 가지고서 잘했다, 못했다를 평가하는 일은 굉장히 쉽다. 남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만큼이나 밑그림의 오류를 발견하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그림으로 치면 드로잉이다. 나의 드로잉이 시장에서 고 박수근 화백의 드로잉처럼 좋은 가격에 팔리지 않는 건 오로지 나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더 잘하기 위해 너의 드로잉을 전체적으로 다 지울 거야, 그 과정 속에서 너의 잘못이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인 것이다. 그런 화살쯤은 이제 좀 견뎌야 하는데 나란 애는 감정적으로 예민해서 쉽게 수긍하지 않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면, 이번 결과물은 예견된 결과이다. 보통 6명이 달려들어 드로잉을 하는데. 이걸 혼자서 해야 했고, 시간은 없고(빨리 달라고 내내 닦달), 분량은 많았다. 물리적으로 되지 않은 일을 한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제작사 대표는 돈이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이고, 중간에 낀 꼰대는 아이템 선정부터 자신이 더 관여해야 한다고 훈수를 둔다(이번 판을 이렇게 짠 장본인인데도), 그리고 남편은 관망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위치이다. 결과적으로 갑 오브 갑은 이렇게 해서 되겠냐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먹이사슬 맨바닥에 있는 나는 제물처럼 받쳐져 도마 위에 올려져 있다. 내일 갑 오브 갑과의 회의를 통해 어떻게 회쳐질지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로봇처럼 그들이 하라는 지시를 따를 것이고, 그렇게 한 차례 일은 마무리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런 일련의 그 과정들은 내게 비수를 꽂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만 좋다면 무슨 상관있냐는 남편과는 달리 나는 너무 유약하다.



생각해보면 나의 뇌 구조가 예전만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영역별 뇌 지분을 따져 보면, 과거 일 =뇌가 온전히 모든 걸 장악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는 구조이다. 이제는 육아 = 글쓰기 > 일.  이렇게 구성돼 있어 나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물고 뜯어야 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당할 수밖에 없다. 다시는 이 세계에 발을 디디지 말아야지 했지만, 한시적으로 다시 돌아왔다가 강자들에게 물어뜯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단순히 돈을 버는 이 세계에 다시 오기 싫었던 이유는, 나의 각을 깎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 유튜버 90년대생 이연이 했던 말이다. 나의 각이 깎이는 건 개성을 잃는 것이다, 소금이 되어야 하는 쉽지 않다... 90년대생에게 배운 이 처절한 가르침에 나는 구구절절 공감했다.



내가 글쓰기라는 세계를 좋아하는 건, 상징과 비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의 세계는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다.(누가 더 많이 차지하는가에 집중된) 그래서 더 폭력적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에둘러 돌아가면 몰이해의 영역이 되어버리는 나의 각들이 그곳에서는 하염없이 깎아져 한다. 나는 상징과 비유라는 세계 속에서 머물러 있는 게 좋지만, 그 세계는 좁고, 타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엔 관대하지 않다. 나의 불운을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소설과 시의 세계가 좁아지고 있다. 소멸위기에 있다. 나는 문학(부류상 대중문학이 아닌 순수문학)을 향유하는 변종 인자로 어쩌면 미래 사전엔 이색 부류로 기억될지 모른다. 자기 계발서나 가벼운 에세이, 대중적인 인문학, 심리학서에 매료될 수 없는 인간이기에 보편성이 떨어진다. 보편성이 떨어지는 나의 글들은 사실 갈 때가 없다. 시대와의 행복한 조우가 될 수 없다는 건 진심 비극이다. 유연한 대중성을 지닌 이들이 부럽다. 대중성이 곧 재능이 되는 시대인데 그렇지 못한 나는 배회를 일삼고 정착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각을 그냥 살리기로 했다. 친구와 톡을 하다가, 오덕에 가까운 나(그렇다고 대단히 많은 책을 읽은 건 아니지만 다만 좋아하는)와 오덕의 영역을 넘어서 내 친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얘기를 했다. 어쩜 진화과정 속에서 멸종될지도 모른다. 멸종위기에 몰린 이 부류들이 자본의 세계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친구는 길을 찾았지만, 나는 아직도 헤맨다. 그리하여 나란 변종 부류는 자본의 세계에 입성할 때마다 상처 투성이가 될 것이다. 결국 상처가 내게 길을 내어주지 않을까? 나는 가느다랗게 짐작만 하고 있다. 이는 부정도 긍정도 아닌, 나라는 본연의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하여, 나는 여전히 눈치 보지 않고 쓰는, 이 글쓰기 작업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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