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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Oct 14. 2020

불편함의 끝판왕, 소개팅이여 안녕히

소개팅의 성공확률이 낮은, 나만의 이유

30대 초반, 내 인생 마지막 소개팅을 복기하자니 헛헛한 웃음만 나온다. 신촌에 있는 대학의 대학원에 다니던 친구가 주선해준 자리이다. 같은 대학원 선배를 소개해줬는데. 영화와 만화 등의 콘텐츠에 관심이 많아, 나와 대화가 통할 것 같다고 했다.


어느 초여름이었을 것이다. 나는 꾸민 듯 안 꾸민듯한 차림새로 소개팅을 나섰다. 조금 일찍 도착해 신촌 주변을 걸어 다녔다. 예전 클럽이 있던 자리라든가 지금은 사라진 사회과학 서점 자리 등을 둘러보면서 괜스레 추억이 밀려왔다. (이게 문제였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썩 괜찮다까지는 아니지만, 그 역시 나를 보면서 같은 생각이지 않았을까.


'그리 썩 괜찮진 않네'


카페에서 만나 남의 뒷다리 긁는 대화만 이어갔다. 가끔 대화를 할 때 직구도 던져야 하는데 이건 웬 포크볼만 연속으로 날아오는지 애매하게 공을 주워 담았다. 솔직히 소개팅 자리가 불편한 건 대화거리의 부재이다. 처음 만나서 공통으로 공감할만한 소재가 무엇이 있겠는가. 파리가 빙빙 돌듯 대화창이 허공 상태가 되면, 중간중간 소환되는 주선자인 나의 친구. 깊게 들어가기도, 깊게 파헤치기도 애매한 주선자의 과거사는 심심풀이 땅콩처럼 계속 손이 갈 수밖에 없는 안주거리가 되었다. 할 얘기가 너무 없다고 할까.


빙빙 돌다가 그와 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둘 다 일본 만화 작가 ' 아다치 미츠루'의 팬이라는 점. 내 주변에서 아다치의 작품 넘버를 줄줄이 꿰고 있는 남자는, 나를 아다치 미쓰루의 세계로 끌어들인 친오빠 말고는 없었다. 그렇게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그 외 최고 작은 '터치'냐 'H2'냐 '스텝'이냐 '러프'냐 당신의 생각엔 어떤 작품이냐를 서로 핏대를 올리며 얘기했다. 나는 러프도 좋지만, 역시 최고는 쿠니미 히로의 H2라도 목청을 높였다. 소개팅남은 어떤 작품이 좋다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내겐 중요하지 않은 소재였다.


드디어 카페를 탈출했다. 더위가 시작될 무렵을 감안해, 신촌의 노천에 펼쳐진 호프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서로 맥주를 마셨다. 같이 왔지만, 각자 마시고 온 느낌이다. 좋아하는 코드는 찾았으나 그럼에도 대화를 영 비껴나갔다. 분명 대화 소재거리를 건져 도마 위에 올려놨는데 영 요리로 만들어지지 않는 기분이다. 국민생선 고등어나 갈치, 가자미 같은 보편성을 지닌 생선 이어야 했을까. 우리의 대화 소재는 어쩜 개복치나 도치, 물텀벙 같은 어물전 망신 준다는 생선들인 걸까?


대화의 기술이라곤 내 아는 것들 잘난 척하는 것뿐이니 그런 걸까? 이를 테면, 이런 대화들이다.


그가 묻는다

"아다치 미츠루 말고 좋아하는 애니 작가는 누구나?"

 " 당근 우라사와 나오키가 최고 아닌가?"


그러면서 혼자 떠들어내기 시작한다. '마스터 키튼'과 '몬스터' 그리고 내 인생 작인 '20세기 소년'에 대한 장황한 설을 늘어놓는다. 물론 소개팅남이 대화에 끼지 못하도록, 과거 홍대 클럽에 공연하는 속사포 래퍼에게 배운 듯한 기술을 시연한다.


"따다다다다다 따다다다다"


쉬지 않고 입으로 타자를 쳐댄다. 소개팅남이 슬슬 지루함을 얼굴에 드러낸다. 그의 맥주 마시는 속도는 점점 더 가속이 붙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얘기한다. 오늘 내가 말이 많은 이유는 불편해서 그렇다. 모르는 사람과 처음 만나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안 그래도 불편한데 대화마저 공백이 많으면, 나는 불편함을 뛰어넘어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더 많은 말을 내뱉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불편한 자리에서도 말하기 싫으면 입 한 번 뻥긋하지 않을 정도로 뻔뻔해졌지만)


나의 최대 실수는 대화의 무공백 상태을 못참는 것. 자꾸만 상대방의 말을 브로킹으로 받아치는 기술은 배구에서나 유용한 기술이다.  소개팅은 핑퐁게임이다. 상대방이 나의 얘기를 치고 들어올 공백을 만들어줘야 한다. 치고 받는 대화 속에 싹트는 애정이란 말이다. 무엇보다 대화란 일방통행이 아니니까. 상호 작용이 기본 마인드인 대화의 룰에서 나는 상도가 어긋나는 짓을 한 것이다.


회 치기가 힘들다면, 보글보글 얼큰하게 매운탕으로도 끓여지면 좋으련만, 대화는 점점 더 맥을 잃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신촌에 일찍 도착해 이미 몇 바퀴 돈 상태였다. 맥주를 마시니 노곤해졌다. 나의 혀는 점점 더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소개팅남도 점점 더 안드로메다로 향하는 모습이다. 옆자리엔 외국인들이 술을 마신다. 되지도 않은 영어로 그들과 블랴블랴~ 그 틈을 틈타 나는 호프집을 빠져나왔다. 아니 도망쳤다.


12시가 좀 넘은 시각에 집에 도착했다. 오자마자 겨우 씻고 바로 잠들었다. '역시 소개팅은 피곤해'를 외치며 다시는 소개팅을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다음날 그의 문자가 왔다.


"잘 들어가셨나요? 저도 취해있어서. 독특한 세계관이 있으시네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을 기약하자는 밑밥이 깔리지 않는 문자이다. 이렇게 나와 소개팅남의 만남은 당일로 끝맺음을 했다. 지금은 길 가다 만나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어렴풋하게 아다치 미츠루로만 기억되는 그 남자. 그도 나처럼 소개팅은 역시 성공하기 힘들다는 보편의 논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한동안 소개팅을 멀리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처럼 소개팅과의 연을 잘라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와서 생각한다. 불편함의 끝판왕! 소개팅에 대한 고찰!

  1항. 소개팅 성공확률 0.00001% . 그래도 당신은 도전하시겠습니다. 예스 or 노로 대답해주세요


나의 대답은 당근 NO~

(이제는 기혼자 ㅎㅎㅎ)


어쩜 나는 소개팅 자리에서도 프로패셔널하지 못했는가. 미숙해보여서 당시 동안이라고 봐줬던가?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자리, 아무리 생각해도 소개팅은 내 체질이 아닌가보다.


p.s  소개팅 성공확률에 대해서는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소개팅으로 좋은 만남을 어이가고 있는, 세상 무수히 많은 커플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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