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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Jan 10. 2021

차갑지만 따뜻한 위로...괜찮은 눈에 대한 기억

눈에 대한 감각의 회고

눈이 쏟아진다. 마치 공포 영화 속 사건이 발생하기 전, 전조현상처럼, 밑밥처럼 깔리는 하얀 눈. 싸락눈이 아니라 함박눈이다. 눈사람을 만들기 좋은, 잘 뭉쳐지는 그런 눈이다. 함박눈은 좋지만 폭설은 좀 무섭다. 내가 만약 저 풍경 속으로 들어가 액션을 해야하는 배우라면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눈을 바라본다. 눈의 위력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강력하게 세상을 뒤덮어버리는 능력. 눈은 세상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어릴 때 눈이 오면, 대문 앞으로 나가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은 차갑지만, 나는 위로를 해준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그 괜찮은 눈을 맞으면 지루한 겨울 방학을 견뎠다. 눈이 한 번 내리고 나면, 골목은 꽁꽁 얼어붙는다. 길마다 미끄럼틀이 만들어진다. 나는 뽀드득 눈 밑에 깔린 얼음길을 발끝으로 확인한다. 겨울 방학이 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눈이 오면, 마음이 풀어진다. 끓는 물에 달걀을 풀어 계란국을 만드는 느낌처럼 훈훈하다. 눈의 외형은 차가운데 그 안은 마음을 녹게하는 따뜻함이 있다. 


내 몸의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이 있다. 어린 시절 나에게 그날은 눈이 오는 날이었다. 눈이 오면, 움추려있던 내 감정들이 기지개를 편다. 주름 한 점없이 빨래줄에 걸려 바람에 몸을 맡긴다. 그 어떤 계산 없이 순수하게 눈을 받아들일 때만 느낄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이런 감각들이 깨어나기 까지 오래 걸린다. 아예 오지 않는 날도 있다. 눈의 감각이 무뎌진 것이고, 눈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엔 내 속은 너무 까맣게 타버린 모양이다.


아직도 기억난다. 눈이 오는 날, 나 혼자 집 주변 담장을 빙빙 돌면서 쌓인 눈을 반복적으로 쓸어내렸다. 눈은 다시 담장을 타고, 내리기 시작한다. 마치 내가 눈을 뿌리는 사람이 된다. 벽으로 난 우리집 창을 보면, 눈이 오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눈이다. 눈을 뿌리고 나면, 다시 홀로 좁은 골목에 서있는다. 옆집 친구와 놀자고 문 앞에서 소리 치고 싶지만, 그날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친구집 창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기울인다. 친구는 친구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시간을 나는 뺏고 싶지 않았다. 


친구네 집 마루에는 당시 유행하던 태광에로이카 전축 세트가 놓여져있다. 친구방에 가면, 책장 빼곡히 내가 좋아하던 학습만화 전집과 백과사전이 있다. 친구에게 잘만 얘기하면, 나는 그곳에서 몇 시간정도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친구 집 대문의 문턱은 너무 높았다. 나의 본심을 드러내기엔 너무 소심했고, 용기가 없었고, 그 집의 온기는 너무 따뜻했다.


그럼에도 나는 괜찮았다. 눈이 오면, 나는 잠깐 외롭지 않았다. 눈 속에 파묻혀있던 잠시 시간동안 내 마음도 하앟게 표백된 기분이다. 엄마가 올 때까지 견딜 수 있는, 잠깐의 에너지를 충전한다. 나는 골목 입구에서 서성대면서 눈의 위로에 마음을 연다. 


어른이 되어 깨달은 건, 일상은 우울함과 기쁨의 반복이라는 것. 더 나이들어 깨달은 건 일상은 감정의 흐름으로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라는 것. 기쁨과 슬픔 사이, 웃음과 울음 사이, 놀람과 실망 사이, 그 어딘가에서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일상의 공기는 매일매일 나를 새롭게 감싸준다. 매일 새벽, 일상의 공기를 들이 마시며 생의 감각을 일깨웠다.


공룡처럼 거대한 눈이 내린다. 그 옛날에도 이런 눈이 오면, 잿빛 동네가 하얀 눈 세상이 된다. 마법의 눈은 잠시 나를 정서적으로 환하게 밝혀주었다. 눈부신 하얀 빛들이 쏟아진다. 구겨져있던 내 마음도 빳빳한 린네천처럼 쫙 펴진다. 눈이 녹으면, 마법은 사라지고, 잿빛 동네는 원래대로 돌아오겠지만, 잠시 꿈이라도 꾼 것처럼 나는 들떠있었다. 


골목은 좁다. 좁은 골목길을 내려가는 길목마다 사람들이 산다. 좁디좁은 골목마다 빼곡하게 붙어있는 집들을 볼 때마다 신문을 뜯어 모자이크를 하던 미술 시간을 떠올린다. 회색 신문을 뜯어서 모양을 만들어봤자 내 눈엔 근사하지 않았다. 달동네 무허가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서 아등바등 사는 그런 형제 같았다. 


눈길을 걷고 또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원점은 우리집 문 앞. 멀리 가지도 멀리 갈 수도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내 꿈은 지금 어딘가에서 눈처럼 흩날리고 있는 걸까. 보이지 않아도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다. 가끔 그 형체를 드러내준 꿈을 쫓아 나는 오늘도 눈길을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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