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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Jan 30. 2021

요즘은 경력보단 능력이라던데...

21년 차 프리랜서 방송작가의 비애

스튜디오에서 프롬포터를 세팅하는 중이었다. 패널용은 2부 작가가, 강연자 용은 내가 맡았고, 관련 ppt는 조연출이 맡는다. 대표가 자기 컴퓨터를 교수님용으로 세팅할 거라더니 스튜디오에서 갑자기 맘이 바뀐 모양이다. 갑자기 방송국 노트북을 나보고 쓰라는 것이다. 나름 자신의 애지중지한 노트북을 이번에 잠깐 일하는 작가에게 쓰라고 하기 싫다는 느낌이었다. 나에 대한 그의 거리감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앞에서는 '작가님'이라도 최대한 예우해주지만, 그 역시 어떤 면에서 낯을 가리는 부분이 있고, 상대에 대한 벽을 쉽게 무너뜨리는 그런 성향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에게 배정된 노트북을 가동해보니 뭐랄까? 너덜너덜한 상태라고 할까? 노트북 자판이 너무 헐거워져 내가 뭘 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구름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서 더 이상 사용자의 상태를 배려할 수 없는 노트북이 되었다. 노트북의 운명을 안타까워하기도 전에 나는 녹화 내내 뒤통수가 따가웠다. 헐거워진 자판을 치면,  오타는 계속해서 나온다. 게다가 내 컴은 맥이니 윈도우와는 구동 자체가 다르다. 옆에서 담당 피디가 나를 노려본다. 계속 잔소리한다. 이래라저래라 하는데 이 역시 불편하다. 마치 기기를 잘 다루지 못한 나를 보며 한심하다는 식의, 뭐 그런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다.



결국 나는 1 녹화만 하고 나는 그냥 집으로 갔다. 2 녹화에선 나의 역할이 배정돼 지 않기 때문이다.  역시 그들이 나를 배제한 건데, 1 작가가 2부에 관여하는  불편했던 모양이다, 이것도 서로에게 친밀한 그들이 나에 대한 거리감을 표시하는 방법이지 않았나 싶었다. 굳이 1 작가가 우리 녹화가 도움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작가를 보며 여러 생각이 했다. 우리는 '00 씨와 처음부터 내용을 공유했어요'라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얘기한다. 나도 그들을 경계했고, 그들 역시 나에게 높은 장벽을 거두지 않았다.( , 2 담당 피디만이 친절하게 메뉴를 공유했고, 간식을 가져다주었으며, 내가 있던 잘에 히터를 틀어주고 갔다. 이것은 천상 성향인가? 친철함이 몸에  이가 무리에서 잠깐 돌발행동을  기분이다.)



그때 나는 관계의 거리감에 대해 생각했다. 박힌 돌 사이에서 굴러온 돌이 잠깐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꽤나 뻔뻔해지지 않으면, 소심해지기 쉬운 상황이 펼쳐진다. 나는 원래도 소심한데 상황마저 소심하게 돌아가니 내 의견을 말하는 게 불편했고, 어느 순간, 내가 의견을 말하면 그들이 불편해했다. 굳이 저렇게 까지 해야 하나 왜 저러나 싶은 그런 뉘앙스, 내가 한 말이 한귀로 흘려지고 있다고 느껴지니 어느 순간, 나는 입을 닫았다.



집단과 개인 사이에 쉽게 벌어지는 일이다. 나는 늘 집단에 들어가 있는 입장이 아닌, 프리랜서이므로 지난 20년간 이런 상황에 직면해왔었다. 투쟁 속에서 연대가 발생하면, 그 집단에서 오래 함께할 수 있었고, 적응하지 못하면 다시 구르는 돌이 되어, 파인 홈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20년이 넘었다. 21년 차 작가라는 경력이 주는 무게감이 어마어마하다. 나에겐 무겁지만, 상대들의 귀엔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일하는 작가이니 일이나 잘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들 말이다. 경력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요즘은 경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잔인하리만큼. 이번에 나는 마치 인공지능이 되어 모든 일을 해치워나가야 했지만, 막내작가의 업무를 안 해본 지 10년이 넘었으니 잘 못했다. 막내 작가의 업무는 절대 사소하지 않다. 꼼꼼하게 체크하고 준비해야 하는 업무들이 산재해있다. 나는 자료 조사부터 대본 쓰기, 녹화 준비까지 혼자 하면서 생각했다. 결국 이러다 나는 인공지능에 밀려나겠구나라는 생각 말이다. 인건비 절약을 위해 기본 3명 이상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하고 있고, 게다가 느리다고 타박을 받고 있다. 박힌 돌들은 이미 그 부분에 있어 트레이닝이 돼 혼자서도 몇 사람분의 업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선 그것이 당연하며, 그것이 능력의 기준선이 된다. 사실 몇 사람만 더 붙어도 결과물의 질은 다르다. 하지만 인건비를 아껴하는 대표 입장에선 어림도 없다. 결국 나 같은 굴러온 돌은 헉헉 대다가 저 산 밑으로 나뒹굴고 만 것이다.


굴러온 돌이 버티는 방법은 결국 나에게 배정된 인건비를 나누는 것이다. 막내를 내가 뽑아서 일을 하면 욕은 덜 먹고, 퀼리티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나의 인건비는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 요즘 일하면서 늘 고민이 되는 지점이다. 어떤 작가는 그런식으로 후배들과 함께하는 걸 봤다. 하지만 기혼 상태에서 남편이 직장을 다니고 있고, 애가 없다면 가능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런데 나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므로 혼자서 감내하다 나가떨어진다. 어쩌면 인건비를 나눠 일의 부담을 줄이는게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제작사 대표는 이미 나에게 많은 돈을 주었으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경우가 요새는 더 많아졌다 ㅠㅠ)


여하튼 끝이 났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이번 일로 나의 업무 능력이 어느 부분에 치중되어있는지 알게 되었고, 전체적으로 혼자서 모든 일을 내 성이 찰 때까지 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 것이다.  업무를 분업화하면서 그동안 해왔던 작업들에 감사할 따름이다. 앞으로도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많은 일들이 벌어질 텐데, 그때마다 나는 헉헉대면서 일을 할 텐데 앞으론 또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갈까. 이번 일을 계기로 나의 능력치에 대해 깨달았다. 그리고 과연 일에 있어 무엇이 중요한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숲을 봐야 하나 나무를 봐야 하나, 둘 중 무엇이 중요한가?"



결론적으로 둘 다 중요하다. 예전엔 숲은 메인이 봤다면, 나무를 서브나 막내의 역할이었다. 이제는 숲과 나무를 다 봐야 하는데 쉽지 않다. 문득 나의 6~7년 차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둘 다 볼 줄 알았다고 자만했다. 하지만, 나는 나무밖에 못 봤다. 숲은 보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것은 사실 경력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능력이지만,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 능력도 좋고, 가성비도 좋은 프리랜서가 되기 위해 혼자서 감내해야 한다. 앞으론 더더욱 그럴 텐데 일의 강도는 높아지고, 나의 체력은 점점 바닥을 치고 있으니 말이다.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에 내가 껴있었다. 나는 아무 말없이 폰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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