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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Nov 02. 2020

마음을 다잡을 땐 활처럼 허리를 꺾어라

썸으로 기억되는 활자세에 대한 소고

결혼 전 일이다. 갑자기 오른쪽 바깥다리 쪽이 저려왔다. 허리부터 발목까지 찌릿했다. 약간 절뚝거릴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사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정형외과로 다급하게  달려갔다. 연예인들과 찍은 사진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는, 그런 병원이었다. 의사는 나의 상태를 대충 둘러보더니 충격적인 말을 했다.



"디스크네요. 수술해야 돼요. 수술 안 하면 장애가 생길  수 있어요"



갑자기 허리 쪽이 찌릿했다. 아차 하던 순간, 내 앞엔 병원 코디네이터가 어서 사인을 하라며 종이문서를 펼쳤다.



"꼭 수술을 해야 하는 건가요?"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니까 하셔야죠. 언제가 좋죠?"



대충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남친(지금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리 디스크 수술 잘 못했다가 못 걷는 수가 있다. 내가 병원 알아볼게"



수술은 가당치도 않다며 성을 내던 남친. 문자로 강남의 유명한 디스크 전문 치료 병원 번호를 보냈다. 얼마 전, 아는 분이 갔다 왔다며 예약을 당장 하라고 했다. 상황이 급하다 보니 바로 날을 잡아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가니 나이 든 어르신들이 바글바글 댔다. 나만 너무 젊어서 병원에 왔다는 생각이 스치자마자 진료실로 들어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저보고 수술 안 하면 다리를 절뚝일 수 있대요"



의사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급성 디스크예요. 도수 치료와 걷기, 운동 요법으로 10회만 진행할게요"



1회 치료비가 당시 10만원이니 무려 백만 원의 치료비가 든다. 수술은 하지 않고, 도수 치료 10회와 운동 치료 2회, 걷기 지도 1회 및 식단 지도까지 체계적인 진료가 진행됐다. 운동 치료도 하고, 걷는 방법도 배우고 건강한 식단에 대한 지도로 해줬다.



가장 중요한 치료는 도수 치료는 매주 일주일에 1번씩 받았다. 당시 나를 맡은 담당 도수치료사는 호주에서 공부를 하고돈 30대 남성 치료사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치료하는 손길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런데 나의 촉이 자꾸만 꿈틀댔다. 말투부터 친절함을 탑재한 치료사는 가끔 내가 사오정이 되어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히죽대면서 웃었다. (마치 귀엽군이란 반응처럼...^^;;;)



특히 나의 직업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는 대단하다고 했고,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별거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회를 거듭할수록 그의 손길이 내 몸을 닿을 때마다 느낌이 이상했다. 촉감 속에 담긴 감정의 온도가 다소 뜨거웠다. 물론 그는 진지하게 나를 치료해 줬다. 나에게 오늘은 어디가 가장 아픈지 물어보고, 진료실까지 옮겨가며 온갖 도구를 가져와 치료에 최선을 다해줬다. 그럼에도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전깃줄이라도 쳐진 것처럼 그와 나 사이에 걸쳐진 찌릿한 무언가, 그 감정의 실체에 대해 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별다른 진전을 없었고 별일도 없었지만, 오고가던 썸의 감정은 숨길 수 없었다. 내가 많이 아프다고 했던 날, 이번에도 다른 진료실로 데려가 각종 기구를 가져와 치료를 해줬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그의 행동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내 몸을 닿을 때마다 감정선이 어디까지 올라가는가를  지켜보기도 했다. 그렇게 10회차 치료를 마치고 마지막 날, 계산을 하러 가는 길. 갑자기 그의 손이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너무 말랐네"



그다지 마른 건 아니었는데...  움츠러든 내 어깨를 쫙 펴주며 잘 가라고 했다. 그때 내가 느낀 떨림의 실체는 좀 더 명확했다. 가슴속까지 울림이 전해질까 봐 도망치듯 병원을 나왔다. 낯선 이성에게 설레는 느낌을 너무 오랜만에 받아서일까 나는 괜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 이후로도 가끔 허리가 아플 때면 그 썸남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가 말했던 허리 통증 완화법을 복기한다. 내 몸이 자주 움직이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꺾으라는 것. 나의 경우, 노트북으로 작업을 많이 하다 보니 허리가 꾸부정해진다. 그럴 때 바닥에 누워 활 자세를 해준다. 내 몸이 익숙한 방향이 아닌, 그 반대로 방향을 꺾어야만 통증도 줄어준다는 것. 새우등이 활대가 되도록 당겨준다. 팽팽한 그 느낌은 당시 그와 내가 느꼈던 설렘과 비슷하다. 더는 움직이지 않고, 적정선을 지키던 그는 결국 활시위를 당기지 않았다.



이후 나는 익숙한 방향으로 직진했고, 결혼에 이르렀다. 하지만 허리가 아플 때면, 내 몸이 익숙지 않은 반대 방향으로 허리를 꺾어야 했다. 그때 나는 만일  그 도수치료사가 나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면 어떤 결과가 펼쳐졌을까를 상상한다. 그때 나는 과녁에 꽂힌 그의 활을 기꺼이 뽑아서 그에게 다가갔을까. 허리 디스크가 도질 때마다 내 몸이 낯선 방향으로 기운다. 나는 결국 모험을 하지 않았다.



가끔 허리가 아프면,  자세를   동안 유지한다. 그때마다 가물가물 대는  썸의 감정을 떠올린다. 나는 분명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 단지  썸이라는 감정에 잠시 빠졌을 뿐이다....라고 오랜 ,  감정을 정리했다. 이제 나는 연애 감정에 자유로울  없다. 젊을  연애에 쉽게 빠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물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때 나의 선택엔 후회란 전혀 없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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