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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Nov 04. 2020

슬픔은 극복이 아닌 관찰 대상이다

슬픔은 1인칭이 아닌 3인칭 시점이 필요하다

예민하고 소심한 사람들에게 슬픔은 일상이다. 일상이지만 그들은 개별성을 지닌다. 

슬픔마다 종류가 있고, 그 질감과 속도도 다르다. 다소 거칠기도 하고 아예 매끈하기도 하다.  

그래서 슬픔은 종잡을 수 없다.




어떤 슬픔은 물놀이장의 슬로프처럼 쑥 빠르게 지나간다. 그때 내가 슬펐었나 싶을 정도로 매끈한 슬픔들이다. 예를 들면, 아이와 함께했을 때 겪었던 슬픔들은 빠르게 지나간다. 일단, 아이가 주는 에너지가 속도감 있게 그 자리를 지나가게 한다. 또 하나, 내가 아이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을 생각할 때나, 아이에게 화를 낸 후 찾아드는 슬픔들은 고인 채 두면 일상에 큰 지장을 준다. 아이에게도 그 슬픔이 전해지지 않게 '엄마'는 극복해야 한다. 반드시 극복해내야 하는 슬픔이다. 고인 물처럼 고인 슬픔은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키니까. 엄마는 아이와 함께 물놀이장에서 놀이를 하듯 그 슬픔을 물속으로 첨벙하는 순간, 잊어야 한다. 쉽지 않지만, 노력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하루하루 슬픔을 극복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육아란 엄마의 시간과 감정을 갈아하며, 존재를 소멸시켜야 하는 작업일 수 있으니까.




슬픔의 유통기한은 종종 무제한이다. 슬픔을 유도하는 가장 큰 감정은 바로 '상실'이다.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소중한 시간이나 시절들을 속절없이 지나쳐왔을 때 그 슬픔은 농도가 높다. 동반하는 눈물에는 소금끼가 많아 얼굴을 따끔따끔하게 할 정도로 짜다.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슬픔은 잊히지 않는다. 



지난달, 아빠 산소에 갔다. 장마 기간 동안 봉분이 유실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빠는 무사히 잘 버텨주었다. 아빠가 있는 자리만큼은 동그란 밥그릇을 모양 그대로였다. 신기한 건 할머니의 봉분엔 작은 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잡초들이 무성했고, 할아버지의 봉분은 할아버지의 머리털처럼 성글게 잔디들이 꽂혀있었다. 돌아가신 자의 봉분이 살아생전, 그들의 모습과 유사했다.  



세 묘가 함께 이따 보니 봉분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떠난 그 시점 순서대로 봉분도 노화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아빠는 어린아이의 표정으로 봉분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어린 봉분을 보면서 아빠는 분명 다른 세상에서 또 다른 생을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이 슬픔을 잊고 산 건 아닌가 나를 자책한다. 순간 슬픔은 여전히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보호색으로 변신한 메뚜기가 날아다니고, 노랑나비, 호랑나비가 날아다녔다. 마치 어린 봉분의 친구들 같았다. 슬프지만 이런 슬픔은 흐르는 물처럼 흘려보낸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무릎에 턱을 괴고 바라본다. 그 순간 내가 직시한 이 슬픔은 멈추지 않을 기세로 유유히 흐르고 있다. 영원을 품고 흐른다.




어떤 슬픔은 온갖 부정어들의  씨앗이다. 일이 주는 공포심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압박이 될 때가 많았다. 그때 찾아온 처음 감정은 자책이다. 일에 있어서 특히 갑이 될 수 없는 나는, 나를 책망하는 방식으로 슬픔을 극복하려 했나 보다. 너무 슬픈 나머지, 모든 잘못은 나로부터 시작됐다고 말이다. 그래서 슬픔을 나무라고 꾸짖는 방식으로 그 상황을 모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슬픔이란 적나라하게 나를 보여주는 감정이다. 쉽게 들통나기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나의 슬픔을 감지한다. 나의 자책과 슬픔에 대해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작년 봄,  다큐 작업을 할 때였다. 그때 나는 나의 능력이 현재 어떤 수준인지 알아버렸다. 그 동안알고 싶지 않아 어려운 작업을 피했는지도 모른다. 나의 글쓰기와 영상 해독 능력, 그리고 관계를 수월하게 이끄는 방법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그 일을 내게 맡겼던 대표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결국 본사 쪽에서 강력하게 컴플레인을 요구했고, 그날 밤, 사무실 건물 앞에서 호흡 불가 상태에 빠져 인공호흡기가 필요했던 그 제작사 대표에게 생전 못 들어본 욕설에 가까운 폭언을 들었다. 나를 심하게 자책하고 있었던 상태에서 찾아온 슬픔은 무기력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자신감을이 바닥을 헤매기 시작해 제 입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견뎌야 했다. 그때 찾아온 슬픔 하나로 수만 가지 부정의 단어들이 내 안에 결집했다. 슬픔의 씨앗이 주는 위력이었다. 자생력도 뛰어나고, 생존력도 강한 슬픔. 뿌리를 뽑아도 어느새 또 다른 씨앗이 날아와 싹이 튼다. 이런 종류의 슬픔이 가장 위험하다. 



슬픔은 극복의 대상이 아닌 관찰의 대상이다. 슬픔이란 감정에 몰입할수록 또 다른 슬픔이 더 높은 풍랑이 되어 내 앞을 가로막는다. 늪처럼 빠지기 쉽다. 한번 빠지만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을 극복하려고 한다. 육아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슬픔을 관찰해보자. 내 감정의 층위 가장 바닥에 흐르고 있는 슬픔. 슬픔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촉감은 어떤지, 어떤 소리를 내는지도 제3자의 시선으로 느껴보면서 관찰해보는 것이다. 



슬픔이 1인칭이 아닌 3인칭이 되려면, 대하는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슬픔을 슬프게만 보지 말자. 기쁨을 기쁘게만 보지 않듯. 감정 안에 다양한 감정들이 물감처럼 스며들어 다양한 빛깔을 낸다. 빛깔 중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기보단 빛깔의 조화에 눈을 돌리면, 슬픔 안에 또 다른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슬픔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 위로하는 방식을 찾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슬픔은 1인칭이 아닌 3인칭의 자리에서 나를 조금 덜 아프게 할 것이다. 슬픔을 통해 내가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하여 슬픔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 나라는 작은 숲은 점점 더 무성해진다고 상상한다. 비바람을 견디고, 번개와 천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뿌리내린 그 터를 지킬 수 있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않기로 하자. 어차피 인생은 슬픈 것. 과하게 슬퍼하는 것도, 일부로 슬픔을 억누르는 것도,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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