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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Oct 20. 2020

고3 수험생 얼굴엔 고3이라 써있는걸까

불안과 초조함은 그의 몫... 영문 모르던 고3 시절의 나

불운인지 행운인지 나의 고등학교는 종로에서 가까웠다. 길 건너 (지금은 사라진) 육교를 건너면 인사동이고, 학교 앞 골목을 나와 우회전을 하면 광화문이 나온다. 당시엔 토요일도 오전 수업을 하던 때였다. 토요일 오후, 종로에 가면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빨래처럼 널리고 널려있었다. 그들은 보통 맥도널드에서 빅맥 세트를 먹고, 길거리를 걷다가 뮤직랜드나 교보문고에 가거나 아트박스에서 아기자기한 잇템을 구입했다. 나도 그 대열에서 방황하던 일인이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 고3 때였다. 뭔가 울적한 기분에 수업을 마치고, 교보문고로 향했다. 일행들과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냥 뭔가에 굶주려있었다. 그것이 음악이든 소설이든 시든 간에 그 비스름한 것이라도 섭취를 해야 살 것 같았다.


당시 나는 비틀즈 블랙 앤 화이트 앨범에 빠져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친구 오빠 방 레코드에서 발견했다. 그때 들었던 비틀즈의 음악에 나는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앨범이 cd로 영접하는 순간, 서성대면서 계속 그 주변을 맴돌았다.


고3은 말하지 않아도 수험생이라고 얼굴에 쓰여있는 걸까. 그때 진중권과 윤종신을 섞어놓은, 다소 뾰족한 족제비형의 얼굴을 가진, 체형도 윤종신과 거의 동일한 어떤 성인 남자분이 내 앞에 등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복학생이거나 대학원생 정도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30대 초반의 평범한 직장인일지도 모른다. 그도 음악을 좋아했나 보다. 나의 이런 정처 없음을 발견했다는 건 타인에 대한 관심도가 높거나 기본적으로 외부 현상에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혹시 고3이니?"

"아네..."

"공부 안 하고 음악만 듣나 보네"


그때부터였다. 음악은 나중에 대학 가서 들으라는 잔소리가 시작됐다. 생판 처음 보는, 낯선 남자 앞에서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속으론 비틀즈 앨범 하나가 이런 파장을 불러일으키다니. 비틀즈가 좋아서였을 뿐이라고, 공부를 하기 싫어 안 한 건 아니지만. 뭐 횡설수설 댔다. 


"지금 나오는 음악 뭔지 아니?"

"(아니오)"

"브라더스 포의 그린 필드야"


그때 나는 깨달았다. 저 사람은 분명 본인이 음악 마니아였음을. 음악만 듣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내내 가슴에 두고 사는, 예민함이 철철 넘치는 사람. 그리하여 자신의 감정에 대입하여 나를 끼워 맞춰 생각한 것 같다. 물론 내 나이 또래 중에 비틀즈와 블랙 앨범과 화이트 앨범에 열광하는 아이들이 많진 않았을 것이다. 서태지가 음악판을 전복시켜놨기에 더욱더 그랬다.


즐길거리가 정해져 있던 시기였다. 친구들과 조조영화를 보고, 출연배우 사인을 받기 위해 첫 개봉하는 영화를 보고, 별밤이나 두데 콘서트 티켓을 얻기 위해 태광 에로이카 대리점을 드나들던 시절. 나의 정체성을 음악과 라디오에 뿌리를 부고, 학년마다 나를 캐릭터화하는데 성공했던 나는, 그런 나의 노력을 고3 때 무력화시켰다. 


공부 말고는 더는 생각할 수 없던 시절, 혼자서 공부하느라 고통스러웠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나마 동생들의 성적에 관심을 가졌던 오빠가 군대에 있다. 큰언니는 직장에 다니느라, 작은 언니도 대학에 입학했던 시절이었고, 부모님은 일하느라 생애 최고 많은 노동을 하던 시절이다. 


곧 있을 아파트 입주 시기에 맞춰 중도금을 벌기 위해 부모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고3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뿐. 오로지 관심은 결과론적으로 최종 점수였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뀌든 말든, 아파트 중도금을 벌기 위해 밤낮없이 일만 했다.  내 문화적인 토양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공부에 있어서도 방향을 잡아줬던 오빠도 없다. 큰언니는 방황 중이었고, 작은 언니는 계속해서 나를 공부 안 한다고 핀잔을 주던 시절이다. 나는 숨 돌릴 뿐도 없이 매일매일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나는 그 어떤 투정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나의 미세한 변화를 그나마 감지했던 엄마는 가스활명수를 한 박스 씩 집에 사다뒀다. 한 달에 10만 원 정도 하던 독서실 비용도 꼬박꼬박 대주었다. 엄마는 바빴지만, 나에게 미안해했다. 그런 감정을 아는 나는 오르지 않는 성적 때문에 나는 더 미안했다. 고3 말에 가선 성적이 대폭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지만, 나의 약진은 너무 늦게 가동됐다. 


엄마와 함께 수험장으로 가던 날도 기억난다. 추운 날이었다. 추운 겨울, 교문 앞엔 온 기자들이 떼로 몰려들어 수험생들을 인터뷰했다. 방송 촬영 허가가 나 있던, 그런 학교에서 시험을 보았다. 철문 밖에 잠깐 서서 엄마가 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엄마는 분명 제 역할을 한 것인데 진심 쓸쓸해 보였다. 엄마는 그렇게 나를 걱정하고 사라졌다. 


나는 시험이 끝난 날, 친구와 종로를 돌아다니다 저녁이 되어 집에 왔다. 집안은 난리가 나고, 언니는 나를 흘겨보았다. 그때는 이미 우리 집은 새 아파트로 입주한 상황. 달동네 빈집엔 나와 작은 언니가 살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홍역처럼 수험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나를 가족보다 더 엄하게 타일렀던 그 남자가 가끔 떠오른다. 왜 그랬을까? 그는 어떤 심정으로 그런 말을 내뱉었을까. 1년 후, 대학에 입학해서 이곳에 오면 비틀즈 앨범을 사주겠다는 약속까지. 공수표처럼 허공을 떠돌던 말. 지키지도 못할 약속까지 하면서 방황하는 청소년을 대학이라는 끝물을 맛보게 했던 것일까. (연락처를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떤 전화번호를 준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으리 만무하고.) 사실 지금은 길 가다 만나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인데 그 시절엔 따뜻한, 어떤 정서가 남아있긴 했다. 내가 아직도 90년대를 기억하면 그렇다.


아직도 나는 잘 모른다. 그가 왜 그렇게 열성적으로 내게 음악을 듣지 말고 공부를 하라고 했던, 진짜 이유를.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 시점은 이미 지나가버리고 없다. 사라진 어느 계절의 영문모를 추억 하나만이 내 머릿속에서 복기될 뿐이다. 산다는 게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그 남자의 간섭이 내게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으니. 그 이듬해 다시 시작된 수험 생활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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