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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Oct 23. 2020

글쓰기, 나를 위로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

김창완 옹의 노인의 벤치를 들으며....

요즘 나는 원치 않은 방향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원하지 않는 방향이 곧 내가 싫어하는 방향이라는 건 아니다. 내 몸이 거역하는 건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익숙지 않은 방향으로 나를 밀어 넣는 것을 거부했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나를 찍어내는 것에 안도감을 표했다. 하지만 새로운 길은 익숙한 길 끝에 있지 않다. 알면서도 두려웠다. 그리고 매번 낯선 길에 들어선 순간 깨닫게 된다. 이 힘든 짓거리를 왜 내가 해야 하나. 여기서 빠져나오면 안 될까. 돌아서 다시 원래 익숙한 길로 돌아오기도 했다. 낯선 여행은 좋지만, 낯선 일상은 두렵다. 이것이 지난 시절,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문장이 아닐까.



 언젠가 글쓰기 강좌를 듣다가 들었던 생각이다. 당시 글쓰기는 내게 절실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나는 (상업적인 용도의) 글을 쓰고 있었고, 그것이 나의 일상을 가능하게 했고, 그때 내가 했던 일들이 나를 먹여 살리고 있었으므로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그 기저에는 나는 분명 익숙한 글을 쓰고 있었고, 언제든 나는 글을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자만심이 깔려있었다. 굳이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첫날 강의 때 제출한 글에 내 직업을 커밍아웃했다. 굳이 나를 애써 알릴 필요가 없던 자리였는데도 말이다. 가끔 보통의 일상을 평범하게 영유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매번 튀는 행동이 불쑥 튀어나왔다. 성인 ADHD처럼 충동적인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오만한 감정이 분명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쓴 글들은 반성문 같았다. 왜 그랬을까? 지난 시절의 나를 반성하는 글이 불시에 튀어나와 익명의 다수에게 나의 개인사를 애써 하나하나 일러줬다. 한 사람의 과거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리면, 거부감이 든다. 그런 공기가 강의실 안에 번졌다. 다들 읽으면서 왜 이런 글을 이런 곳에 발표를 해야 했을까는 얼굴로 멀뚱멀뚱 앉아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내 눈가 잔주름 하나하나에도 그 감정이 스며들어, 얼마 되지 않아 그 낯선 길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개인적인 글쓰기를 하지 않았다. 일기 정도의 단상이 가끔 노트를 채웠지만, 나는 본격적인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아예 접었다.



그럼에도 가끔 그때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던 그분을 떠올릴 때가 있다. 그분은 글을 왜 쓰지 않느냐고 반문할 때가 많았다. 그냥 쓰면 된다고, 왜 쓰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멀지 않은 시절에 다녀왔던 여행과 관련된 글을 썼다. 그 글을 보면서 몇몇의 맞춤법을 지적해줬다. 그리고 강의실에 한 자 한 자 읽어주었다. 과제를 내면, 다음 시간에 몇 개의 글을 추려서 강의 때 읽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수정 사항은 카페에 강의 전, 이미 올라와있다. 내 글을 읽기 전, '흥미로운 글'이라는 표현을 했다. 흥미롭다는 건 적정선의 즐거움을 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름 유쾌함과 위트가 담긴 글을 포괄할 때 쓰는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끔 나는 그래, 좀 가볍게 써도 괜찮을 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가볍게, 유쾌하게 글을 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나는 사는 일을 너무 진지하게 대하는 모양이다. 한때 일에 모든 영혼을 다 내다 팔았을 때를 떠올렸다. 마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예민함의 모든 촉수를 동반에 나를 몸살 나게 했던 그 일들. 그 일들이 시간이 내게 준건 적당한 돈이었고, 그뿐이었다. 



그분은 굉장한 독서가이며, 애주가였다. 그리고 언어가 분명했다. 분명한 표현을 한다는 건 삶도 분명하는 것. 자신이 가진 언어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다. 내가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느냐에 따라 말이 달라진다. 화법도 변하고, 쓰는 단어의 체계도 달라진다. 나는 분명 진지한 사람이었고, 그만큼 세상은 내게 무거운 짐짝 같았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돌덩이를 이도 저도 못하고, 굴러가지만 말아다오라는 심정으로 지탱하는, 딱 그만이 내가 본 세상이다. 그런데 세상의 무게란 정해진 게 없다.



몇 년 후, 나는 k 본부에서 다시 그분을 우연히 만났다. 다행히 그분도 나를 알아봤고, 나도 한눈에 그분을 알아봤다. 우리는 단순한 묵례로 서로에게 안부를 전했다. 마치 그의 눈빛은 내게 이런 상상을 하게 한다.



'아직 글을 쓰고 있진 않는구나'



나는 눈빛으로 응수했다.



'저는 괜찮아요. 저는 이곳에서 글을 쓰고 있으니까'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보세요, 저의 직업은 뻥이 아니었어요'



헛헛한 표정을 남기고 그분은 사라졌다. 중요한 건 내 직업의 진위여부가 아니었거늘. 나는 왜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까. 


***



그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성격은 급하지만, 더디게 단계를 밟는다. 나의 특징이기도 하다. 세상과 나를 조율하는 방법에 있어 나는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승부했다. 그것 말고는 내가 버틸 수 있는 힘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를 좀 아껴 쓰려고 한다. 영혼을 매번 내다 파니 이제는 팔 에너지가 없다. 나의 영혼이 빈곤해졌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다시 깨달았다. 나의 글쓰기와 책 읽기로 내 가난한 영혼을 채워야 한다는 것을. 흥미로운 글을 매번 쓸 순 없겠지만, 나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글을 쓴다. 



내 영혼을 울렸던 주인공, 김창완 옹이 앨범을 냈다. 그의 인터뷰를 읽다가 나는 무릎을 치고 말았다. 김창완은 말한다. 



"나 위로받으려고 음악을 만들다니..."



사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글을 쓰고 싶어하는 이유는, 내가 이야기에 매진하고 싶은 이유는 사실 별개 없다.



"나를 위로하는 가장 정직한 방식"



나의 글쓰기는 나를 위로하기 위한 방식의 정석이다. 다른 길로 왔다 갔다 헤맸지만, 글쓰기 말고는 나를 온전히 위로해주는 건 없었다. 음악은 단순히 나를 청자로 만들지만, 글쓰기는 나를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려놓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게 낯설지만, 더 이상 뒤로 물러섰다간 내 인생은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 몰려왔다. 당장 시급해졌다. 그렇다가 다시 주춤한다. 급하게 고개를 넘진 않겠다. 천천히 걸어간다. 낯선 풍광들을 내 눈에 다 담아낼 것이다. 그것이 나를 위로하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다. 나는 더 아프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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