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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는 왜 나이에 집착하는가?

막내는 왜 꼰대의 심심풀이 땅콩이 되었나

by 델리러브

방송작가가 되려면, 필수 단계가 바로 막내이다. 막내 작가라 불리는 이 집단은 집에 가고 싶어도 맘대로 갈 수 없고, 배가 고파도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메뉴를 마음대로 먹을 수 없으며, 귀가 밝아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분히 채울 수 없는 이 직종에 종사하다 보면, 세상 모든 꼰대가 내 주변에만 있는 건지, 내가 꼰대를 끌고 다니는 건지 모를 정도로, 무수히 많은 꼰대에 둘러싸이게 된다.


나의 막내 작가 시절을 떠올렸다. 처음 들어간 곳은 개국을 준비 중인 인터넷 방송사였다. 문제는 개국을 준비만 하고 있다는 것. 친구 언니의 소개로 면접을 보고 들어갔으니, 경쟁 상대 따위는 없었고, 그다음 날부터 바로 출근했다. 출근해서 보니 그곳 직원들은 다들 지상파 방송국 마인드를 장착하고 있었다. 문서 하나를 정리하다가도, 스튜디오 사정이나 규모 등을 확인하면서도, 전에 일했던 방송사와의 비교를 버릇처럼 하고 있었다.


"전에 방송사에서는 이렇게 안 했는데"


"규모가 작아서 어디 가서 방송국이라고 인정받겠어?"


개국이 미뤄진 이유가 경기도 알짜배기 땅에 방송사옥을 짓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인터넷 방송국에 사옥이 무슨 필요일까. 더 놀라운 건 개국 준비 중인 방송사에서 일반 조직해서 하는 모든 행사들을 실천하고 있었다. 체육대회. 엠티, 워크숍, 송년회, 고사 지내기, 수건 돌리기 등. 더 놀라운 건 전원 참석하는 쾌거를 이뤘다는 것. 엠티 때는 플래카드 날리면 단체샷도 찍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당시 막내인 나는 그저 놀라웠다. 꼰대는 사회적인 지위나 위치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보여주기 식의 액션이 전형적인 꼰대의 행실이다.


막내인 나는 카메라 감독, pd, 종편 감독(조그마한 인터넷 방송국에 웬 종편 감독) 등 방송 경력직들에게 '선배'라는 호칭을 강요받았다. 그런데 사회 나와서 하는 선배는 입에 잘 달라붙지 않았다. 관찰자 입장에서 지켜본 결과, 유독 꼰대 기질로 뭉친 그룹이 카메라와 피디 쪽이었다. 특히 카메라 감독들이 더 심했는데, 후배 놀려먹는 것을 취미로 하던 사람들이다. 신입 카메라맨들은 카메라 시중부터 술 시중까지 선배들 뒤치다꺼리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언젠가 내가 처음 촬영 구성안을 썼을 때이다. 전에 메인 작가가 써주던 양식을 받아와 쓰다 보니 카메라의 구체적인 동선이 쓰인 부분을 그대로 구성안에 넣어버렸다. 카메라 감독은 그날 하루 종일 나를 갈궜다.


"우리야 뭐 막내 작가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어쩌겠어"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보다 못한 우리 팀 피디님이 살살하라고 말렸다. 하지만 말린다고 다물 입이 아니었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우려 댔다. 이번에는 조명감독까지 합세해서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사회경험 전무인 나를 놀려댔다. 결국 우리 팀 피디가 촬영 후 그들에게 거한 술을 쏘면서 일단락을 짓긴 했지만, 사실 그날 나는 내가 얼마나 잘 못한 건지 모르겠다.


문제가 된 부분은 예전 촬영 구성안에도 그대로 쓰여 있었다. 그때는 문제 삼지 않았다. 메인 작가가 쓴 것이기도 하고, 자주 보는 얼굴도 아니니 그냥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막내가 쓴 촬영 구성안이라고 하는 순간, 돌변했다. 막내는 메인 작가보다 만만했다.


결론은 더도 말도 덜도 말 것도 없이 막내라는 계급이 만만해서이다


꼰대들로 똘똘 뭉친 이 곳에서 그래도 츤데레 같은 꼰대도 있었다. 특히 옆 팀 피디는 점심시간,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으려 하지 않는 나를 보고, 옆으로 와 조용히 한 마디 해줬다.


"밥도 같이 먹어야 정도 생기고 하는 거야."


그 시절에도 이미 혼밥에 익숙했던 나는 뭔지 모를 뭉클함이 몰려왔다.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단지 저들은 친해지고 싶어서 겉으로 과시하듯 자신을 표현하는 건 아닐까. 과거 살아온 이력도 모르고, 서로의 취향도 모르고, 게다가 이런 걸 묻는 것도 어색할 정도로 친하지 않은 사이니까. 상대에게 다가가는 방법의 다양한 루트가 있는지 모르는 이들에게 꼰대 기질 발휘는 굉장히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꼰대들에게 당해왔고, 꼰대들에게 사회생활을 배웠기 때문이다.


카메라맨 쪽은 곤조라는 게 있다고 한다. 곤조는 근성이라도 번역되는데 군대 문화처럼 계급 지상주의가 있다. 나이불문 방송 경력이 더 많은 사람이 선배로 추대받고, 후배는 선배의 명령에 복종한다. 카메라맨은 무거운 장비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남자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군대 문화가 흡수된 것이다. 그만큼 꼰대는 사회적으로 뿌리가 깊고, 쉽게 뽑히지 않는다.


내게 점심을 같이 먹자는 그분도 입만 열면, 자신이 다녔던 외국계열 회사와 과거 언어 천재였던 면모, 인디 음악인들과의 신분을 자랑하는 전형적인 꼰대였다. 꼰대였으나 내가 그 꼰대에 적응한 이유는 그의 외로운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삶의 낙이라곤 잘난 척하는 건데 항상 열심히 들어주는 막내들이 있어 항상 막내는 그의 표적이 된다. 하지만 무작정 갈고지만은 않는다. 밥도 사주고, 술도 사준다. 배고픈 막내들은 귀를 내어주고, 배를 채운다. 그래도 자주 보고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진심이 아주 조금은 느껴져 그 츤데레 같은 꼰대를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시절을 기억하면,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추억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들과 다시 만나는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집단에서 가장 꼰대가 아니었던, 비 꼰대인 우리 팀 피디님은 지방 방송사의 고위직으로 승진을 했다. 비 꼰대가 꼰대에게 맞춰 살다 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나 보다. 취미가 집 앞마당에서 양궁 하기라고 한다. 장난감이 아닌 진짜 양궁 장비를 구비해서 과녁을 향해 온갖 잡념들을 쏘아버린다고 한다. 머릿속에 대상이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손뼉을 쳤다.


그곳을 나온 후 나는 다른 케이블 방송사로 들어갔다. 막내를 거쳐 서브 작가가 됐다. 예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이었다. 당돌하게도 매번 회의 시간을 2~3시간 늦는 메인 작가에게 한 마디 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메인 작가는 당시 쓰리잡, 포잡을 하느라 굉장히 바빴다. 그녀의 일정에 맞춰 회의 시간을 잡았지만 결국 매번 2~3시간씩 늦기 일쑤였고,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문 열고 들어오는 그 모습에 나는 화가 났다. 나의 시간이 이렇게 버려지는 게 아까웠다. 다행히도(?) 그때 메인 언니는 미안하다며 나를 이해해줬다. 제대로 된 꼰대를 만났다면 나는 자리보존 자체가 위태로웠을지 모른다.


과거 한때, 방송계의 하층민도 아닌, 불가촉천민 신분인 막내 작가. 지금은 막내 품귀현상으로 브라만에 등극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나이가 많든 적든 그 누구든 어떤 존재에 대해 함부로 대하는 건 진짜 아니다. 꼰대들, 당신들의 노잼 인생에 막내를 끌어드려 심심풀이 땅콩 까먹듯 놀려대는 버릇은 이제 좀 접어두자. 시대가 바뀌어 지금은 조금 달라졌으려나. 나이 좀 어리고, 사회경험 없는 게 죄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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