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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무식자의 첫 해외 여행 준비

스마트폰 없던 시절 떠난 여행의 기록들

by 델리러브

여행은 우발적으로 시작된다


첫 해외여행은 우발적으로 계획됐다. 때는 바야흐로 2000년대 초반. 연애도 끝내고, 회사도 이제 막 정리한 친구의 생이 이제 막 가파르게 기울기 시작한, 그 때였다. 당시 그녀가 내세운 묘책은 해외여행. 국내가 아닌 해외라는 사실에 내 귀는 솔깃했다. 얘기가 나오자마자 나는 바로 합류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며칠 후, 각자 어떤 나라로 가야할지 고민한 후 다시 만났다. 뜻밖에 친구 입에서 나온 나라는 ‘터키’였다.


뜬금없는 터키행이라니... 나의 호기심은 갑자기 급발동했다. 터키는 유럽의 끝자락이지만, 유럽보다 물가가 저렴하다. 박물관에서나 봤던 로마 유적지가 생각보다 많다. 해외여행초보인 우리에겐 적합한 여행 인프라가 잘 형성돼 있다라는 이유에서였다.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터키는 월드컵으로 이제 막 형제의 나라로 조금씩 우리나라에 알려진 터였다. 하지만 그 선택의 기저에는 우리는 남들과 다르다는 허세가 살짝 작동했다. 배낭여행자들에게 터키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었고, 우리는 탐험을 하고 싶었다.


며칠 후, 과 동기 언니도 합류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뉴페이스의 등장과 함께 우리는 또 다른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언니가 터키에 가는 김에 선교사 친구를 만나러 이집트에 가자고 제안했다.. 터키와 이집트는 비행기 이동 시 2시간 거리이다. 귀가 얇은 우리는 듣자마자 '이집트'에 홀딱 반해버렸다. '생각도 못 한 아프리카라니 멋지지 않아'라며 우리의 마음은 이미 이집트로 가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한 달간 터키 여행이다. 이제 이집트가 치고 들어왔다.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다 결국 20일은 터키, 10일은 이집트로 합의를 봤다. 나라가 결정되니 여행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자, 이제 출발하자규~!!




아무리 준비해도, 호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카톡이 있었다면, 우리는 매번 여행 준비를 위해 오프라인으로 만나서 얘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강남역 한 카페에 모여 여행 계획을 짰다. 인터넷 정보를 긁어와서 어떤 지역을 갈 것인지, 며칠을 묶을 건지 등을 모의했다. 우발적인 성향의 나에겐 어디를 갈지, 며칠을 묶을지에 대해 한정을 지은건 다 쓰잘데없는 일이었음을 나중에 꺠달았지만 말이다.


세 명의 취향이 각기 다른 탓에 합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수시로 여행사에 전화해 티켓을 문의했고, 알아본 끝에 탑 항공에서 티켓을 구매했다. 당시 터키 항공 직항 티켓이 100만원이 조금 넘었던 기억이 난다. 여행 가기 일주일 전, 메일로 비행기 표를 받았다. 그때는 여행사로 직접 찾아가 티켓팅을 하거나, 우편 또는 메일로 비행기표를 받았고, 긴급한 상황일 경우, 공항에서 티켓을 인개받기도 했다.


여행 중 숙박은 정말 중요하다. 숙박에 투자를 하고 싶던 언니와 돈을 아껴 대충 자겠다는 우리 사이에 팽팽한 대립이 이어졌다. 현지 한국인의 홈스테이 이용하기로 결국 합의를 봤다. 인터넷 한 카페 게시판에 글을 올렸더니 다음날 바로 글이 올라왔다. 관광지 바로 옆은 아니지만, 지하철을 타고 한 번 갈아타면 올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공항에서는 바로 지하철로 연결되니, 숙소를 찾기 어렵진 않다고 덧붙였다. 처음이니 모험을 하진 말자는 생각에 그 숙소를 예약했다.


여행무식자들은 엄한데 돈을 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엄청난 숙박비였고, 술탄 아흐멧의 게스트 하우스에 비해 가격대비 재미도 없는 무료한 곳이었다. 지금이라면 에어비앤비도 있고, 인터넷이라는 바다에 널리고 널린 정보를 통해 숙박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터키에 관한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다음 사이트에도 터키 관련 카페가 두 개 정도 있었던 시절이다. 그만큼 터키로 모험을 떠난 배낭여행자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스탄불 외곽에 있던 그 숙소에서 하루만 묶었다. 젊고 시끄러운 여행자들은 더 이상 이 무료함을 참을 수 없었다. 서울로 여행을 왔는데 수유리에서만 놀다 갈 순 없지 않나! 다음날 여행자 거리인 술탄 아흐멧으로 갔다. 하지만 이곳에선 제대로 된 업자를 만나 터키 호갱되기 유로 체험을 했다. 무려 1박에 1인당 10유로하는 곳에서 잠을 청했다. 1인당 10유로, 총 합쳐서 30유로라니. 게다가 블랙퍼스트도 없었다. 시작부터 바가지를 쓰고도, 그게 바가지인지 솥단지인지도 구분 못한 채 여행무식자들은 그저 좋다고 실실거리고 다녔다.


어찌됐든 뭐든 시작이 반이다. 준비부터 여행은 시작된다. 사실 여행은 준비할 때가 원래 가장 설레는 법. 이제 곧 한 여름에 떠난 여행을 떠난다. 더위와 함께 고행이 시작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채 낄낄댔다. 화장실 얘기. 변비 얘기, 생리통 얘기, 휴지 얘기를 하면서 토일렛 유머에 빠져 실없는 대화만 이어갔다. 실없는 청춘들의 부질없는 농담들. 우리의 여행 준비는 절반 이상 영양가 없는 토크 배틀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컸던 우리들의 첫 짐들


이제 우리는 여행 용품 구입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쿠팡으로 전날 주문하면 다음날 새벽까지 바로 배송되지만, 그때는 온라인 쇼핑몰이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았다. 온갖 사이트를 뒤져서 저렴한 용품을 구입하는 게 더 이득이지만,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당시 친구가 찾은 사이트가 바로 '트러블 메이트'였다. 지금은 여행용 배낭으로 어느 정도 알려진 브랜드이지만, 그때 당시 설립 초기였다. 38리터냐 45리터냐로 고민하다가 친구는 트러블 메이트로38리터 배낭을 주문했다. 나는 태극기가 고정된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았고, 친구와 같은 디자인의 배낭을 메고 다닐 수 없어 직접 매장에서 구입했다. 아울렛 매장에서 당시 7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에 38리터 배낭을 구입했다. 친구와 언니와 함께 우르르 몰려간 쇼핑이라 이 배낭이 내가 원해서 나에게 온 것인지 사실 모르겠다. 사실 등 떠밀려 산 기분이 있었다.


다음은 카메라. 당시 디카가 상용화된 시절이 아니었다. 나는 집에 있는 삼성 케녹스 자동카메라를 가져가기로 했다. 친구는 캐논 필름 카메라를 어디서 구해왔는다. 망치보다 더 무거웠다. 본인 왈 '잡지사에 글을 기고하기로 한 만큼 돈을 받고 가는 여행인데 사진이 중요하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심 나는 부러웠다. ‘우와 필카라니’. 하지만 배낭 여행을 떠나보면 안다. 배낭 무게가 가벼울수록 여행도 즐겁다는 것을. 무거운 짐을 이고, 어떤 풍경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깨달은 우리는 여행 내내 호신용 무기로 적당하다며 친구를 놀려댔다.


필름은 종로 세운상가 옆 카메라 상점 거리에서 대량으로 구입했다. 인터넷보다 오프라인 물건이 더 싸던 시절도 있었다. 요즘은 디카도 아니고, 스마트폰으로 카메라를 대체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땐 필름이 필요했다. 코닥 iso100으로 20개 정도 구입했는데 24롤이냐 36롤이냐 고민하다 36롤로 구입했다. 이마저도 거의 다 쓰고 왔다.(얼마나 쓸데 없는 사진을 많이 찍어댔는지) 나중에 현상해보니 그 돈도 만만치 않았다. 질 떨어지는 사진들도 많아 디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첫 해외여행 사진들은 현상해서 앨범에 꽂아두었다. 이거야말로 고릿적 옛날 얘기 같다. 이제 더 이상 앨범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니까. 앨범을 사느니 외장하드 하나 더 사는 게 이득이다. 앨범은 가끔 추억을 넘기고 싶을 때, 그때 잠시 필요하다. 한때 사진은 넘기는 맛이라고 했지만, 시대가 변했다. 여행 중 남는 건 사진이라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사진도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필카는 마구마구 셔터를 누를 수 없다. 고민 끝에 각도도 잘 잡고, 조리개를 조절해서 사진을 찍어야한다. 스냅 사진이나 당시 유행하던 음식 사진을 찍어대는데는 취약하다.


하지만 당시 디카는 취사선택해서 찍을 필요가 없다. 사진 사이즈를 줄여 용량도 조절할 수 있고, 백업하는 방법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때는 디카를 가져가도 피시방에 가서 씨디를 구워야했다. 당시 ubs는 용량이 적었고, 외장 하드 개념도 없던 시절이다. 지금 여행은 필름도 없고, 무거운 필카도 필요없으니(이건 취향에 따른 선택) 가볍게 짐을 꾸릴 수 있다.


첫 여행은 디카 없이 떠난 마지막 여행이다. 1년 후 떠난 해외 여행에서는 오빠의 산요 디카, 일명 마징가를 가지고 떠났다. 몇 년 후, 장기 여행을 떠날 땐 익서스600을 들고 갔다. 사실 어떤 카메라를 구입할까 고민이 많았다. 캐논의 g시리즈는 무겁고, 미놀타의 하이엔드급 카메라는 무겁고 비쌌다. 결국 나는 익서스 시리즈의 당시 가장 최신형을 구입했다. 그 이후 디카는 급속도로 보급돼 엄청난 인기를 누리다 스마트폰 이후 그 인기가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아쉽지만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다.




배낭 여행은 패션쇼가 아니었음을...


준비 과정은 지난했다. 언니와 친구는 그 와중에 동대문에 가서 원피스도 구입하는 등 여행 의상에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문제는 소재. 마 소재 드레스는 배낭 안에서 접힌 상태로 뻣뻣하게 굳었다. 마치 오징어포처럼. 좀처럼 펴지지 않은 그 원피스는 게다가 실용성도 떨어졌다. 단추로 옷을 여미고, 허리끈까지 둘러야 제대로 입은 것이다. 티셔츠와 7부 바지가 최선의 선택임을 여행을 가서야 깨달았다. 이슬람 국가로의 여행이라 반바지는 제한이 많고, 보는 시선도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원에 들어가려면, 반바지를 입었을 경우 천으로 가려서 들어가야하는 불편함도 있다.


게다가 원피스는 40도에 육박하는 아프리카에서 최악의 코디로 판명 났다. 뜨거운 김이 원피스 안에서 순환을 하는데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돌고 돌던 뜨거운 공기는 자체 히터를 작동해 더위와 한 몸이 되어야 하는 부작용이 일으켰다. 게다가 친구는 청바지를 들고 갔다. 청바지를 입고 사막을 거닐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하하 하하. 그럴 줄 알고 나는 초간단 의상을 구비했다고"


터키에 도착한 첫날, 친구에게 나의 의상 퍼레이드 장면을 떠올려보니, 지금 생각해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얇은 옷들 위주로 준비했지만, 문제는 용량이었다. 배낭의 절반 이상 옷이 차치했으니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 배낭 여행은 패션쇼가 아니라규!!


손전등도 필요하다고 해서 구입한 랜던은 야전에서 쓰일법한 크기로, 내 팔뚝 두께와 비슷했다. 자물쇠도 튼튼한 걸 구입하려다 보니, 대형 사이즈를 달고 다녔다.(이것도 꽤 무게가 나간다). 신발은 운동화와 샌들을 두 개 다 가져갔다. 운동화는 여행지와 안 맞는 화이트 톤이었고(이것도 친구에게 등 떠밀려 홍대 앞에서 산) 그래서 한두 번 정도 신었다. 스포츠 샌들은 싼 걸 구입하다 보니 다소 무겁고 소재가 두꺼웠다. 그나마 제대로 산 건 모자 하나. 이건 터키에서 만난 한 여행자에게 찜 당해, 모자를 울며 겨자 먹기로 바꿨다. 거의 각설이 스타일에 더 가까웠고 그 해 여행자들 사이에 워스트 코디로 꼽힐만했다.


책도 하나 가져갔는데 지금은 국내에서 스테디셀러로 유명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였다. 당시 신문 단신에 새 책으로 소개됐는데, 보통이 누군지도 모르고(당시 국내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음) 책 제목만 보고 덜컹 구입했다. 초판이라 그런지 책 표지는 무지 촌스러웠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곶감 꺼내듯 한 장씩 한 장씩 읽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배낭은 어찌 됐든 완성됐다. 그리고 대망의 여행이 이제 곧 시작된다.





여행유발자는 어떻게 탄생했나


하지만 넘어야할 가장 큰 산이 하나 남아있었다. 지금 일하는 있는 곳에 한 달간 여행을 갈 것이니 그만두겠다고 얘기해야 할 시점이 왔다. 직구를 던지는 스타일인 만큼 나는 팀장님에게 바로 직구를 날렸다.


"해외로 한 달간 여행 가기로 했습니다. 그만 둘게요"

"아 그래? 어디"

"아네 터키요"


팀장님은 세상 쿨하게 한 마디 했다.


"그래. 한 달 치 일 다하고 가"


그 한마디를 내뱉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뜨던 팀장님. 같이 일하던 조연출과 피디는 이제 한 달간 어떻게 일을 할지, 어떻게 아이템을 정리할지 당장 내놓으라고 했다. 결국 나는 여행 가기 전날까지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마운 결정을 내려주신 팀장님께 넙쭉 절이라도 하고 싶다. 돈도 없던 시절, 다니던 곳까지 그만두고 여행을 가겠다는 무모한 결심한 나. 대책없이 항상 나에게 내일은 없다를 외치고 다니던 나. 다행인 건 여행이 끝나고 갈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노트북 들고 해외에서 일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당시 노트북은 탱크 수준으로 무거웠고, 인터넷 사용도 거의 불가했다. pc방 이용도 심장 건강을 위해 멀리하는게 좋던 시절이다. 느려터진 나무늘보가 커서를 조종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먹통에 가까운 속도였다. 불가리아의 벨리코타르누보라는 소도시 피디방에선 피시를 켜는 순간, 정전된 경우도 있었다. 그날 나는 공쳤다싶어 카페에 갔고, 아이스 커피를 시켰다. 이어 진짜 아이스 커피가 나왔다. 아이스크림 커피. 여행하다보면 뭐 이런 날도 있지라며 위로했다.


나의 한 달간 터키 여행 이후 일터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나는 급기야 '터키 소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고(일부 사용), 다들 나도 언젠가는 떠날 거라 다짐하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이듬해 봄, 같이 일하던 피디는 40일간 인도 여행을 갔다. 같은 팀의 다른 선배는 몇 달 후 퇴사를 하고, 동남아 장기 여행자가 됐다. 선배 작가는 태국 병에 걸려 틈만 나면 태국으로 떴다. 나의 첫 여행에 여행경비까지 보태준 메인 언니도 일주일간 파리로 여행을 갔다. 마치 내가 여행 유발자가 된 것처럼, 나의 여행 이후, 다들 많이들 떠났다.


아마도 내심 어디든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일탈이 자극이 되어 용기를 냈을 것이다. 사실 여행은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이다. 그래서 여행은 취미가 될 수 없다. 인간은 농작을 하기 시작하면서 정착을 했다. 하지만 태초의 인간은 유목민이다. 살기 좋은 기후로 이동하고, 먹을거리가 있는 곳으로 때가 되면 이동했다. 유목민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은 이미 본능적으로 여행을 즐길 줄 안다. 그래서 가끔가다 우리는 낯선 곳으로의 이동을 통해 생의 기류를 바꿔줘야 한다. 고인 물이 섞듯 생도 마찬가지다. 성장의 기반을 마련해줄 가장 좋은 자양분이 바로 여행임을, 떠나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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