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프라하에 가면, 내가 다시 파벨 아저씨는 만나야 하는 이유
막연하게 프라하에 가면 파벨 아저씨를 만나고 싶었다. 과거, 공산주의 국가였던 체코. 수도인 프라하도 개방의 바람이 불었다. 자본주의의 도입으로 다들 각자도생을 해야 했던 그때, 자신의 집을 여행자를 위한 숙소로(일종의 홈스테이) 개방한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국 여행자들에게 잘 알려진 프라하의 파벨 아저씨와 부다페스트의 노란 아줌마가 대표적이다. 에어비앤비가 없던 시절 얘기다. 당시 전화나 이메일이나 카페 게시판으로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 한인 민박과는 달리, 파벨 아저씨는 예약제가 아니다. 프라하 기차역에서 여행자들을 기다리는 파벨 아저씨를 만나면, 운 좋게 프라하의 숙박이 해결된다.
아마도 한인 민박집이 많지 않았던 시절, 한 한국 여행자가 프라하 기차역에서 이분을 만났고, 이분의 집에서 편안한 숙박을 해결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터넷을 통해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 이후 프라하에 가면, 파벨 아저씨 네로 한국 여행자들이 구름처럼 우르르르 몰리기 시작했다. 파벨 아저씨를 만난다는 건 프라하 여행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면 한국 배낭여행자들에게 무수히 많은 여행정보를 입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북과 인터넷 조각 정보로 여행하던 시절 얘기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역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봤다. 근거리에서 포근하게 웃으며 서 있는 나이 든 남성이 있다. 다가가 물었다.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석처럼 그에게 이끌려 트램 종착역 근방에 위치한 조용한 저택에 도착했다. 버스 종점에 내려 바로 보이는 골목에 위치한 집이다. 정원이 있는 2층 집인데, 1층에 큰 방이 하나 있고, 2층에 작은 방과 큰방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각 층에 있는 거실과 부엌, 화장실이 공용 공간으로 제공된다. 남녀 구분이 되어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구분도 파발 아저씨가 했다기보단 그곳을 거쳐간 여행자들이 만든 룰로 기억한다.
파벨 아저씨 집이지만, 파벨 아저씨는 그곳에 잘 없다. 새벽 6시면, 기차역 철로를 점검하는 수리공으로 일하고(공공 근로 같은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 뒤로 또 다른 일을 하시는 것 같았다. 아저씨가 있건 없건 이 공간은 여행자들에게 24시간 오픈된 공간이다. 아침으로 식빵과 잼이 제공할 뿐, 별다른 개입 없이 우리를 방치(?)한 아저씨. 그 덕에 우리에게 주어진 건 오로지 자유! 완벽한 자유의 시간이다.
프라하에서 3박 4일 동안 머물렀다. 여름 한 철, 메뚜기떼처럼 몰려와 일박을 하거나 반나절 있다 가던 한국 여행자들에 비하면, 나는 이곳에선 자칭 장기 여행자였다. 프라하는 여행 초반에 들렸는데, 이때 내가 프라하에 바랬던 건 단 두 가지였다.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맛을 선사하는 체코 맥주 아니 체코 피보 그리고 당시 한국 tv에서 무수하게 재가공된 낭만이라 불리던 프라하라는 공간 자체였다.
일단 맥주는 생애 이 보다 더 많은 낮술을 마셨을까 할 정도로 많이 마셨다. 프라하에서 즐겨 마신 맥주는 필스너 우르켈이라는 플젠 지역 맥주이다. 향긋한 과일향이 조금 나고, 밀맥주처럼 약간 밀도가 높았다. 알코올 도수가 낮은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 홍대 맥주집에서 필스너를 마셨는데 맛은 유사했고, 도수도 높아 적당히 마셔야 사람 꼴을 유지할 수 있는 맥주였다.
노천카페에서 점심을 먹을 때면 나는 늘 필스너를 만났다. 한 여름, 프라하의 뜨거운 볕을 닮은 황금빛 맥주가 내 몸에 실핏줄을 타고 서서히 흐른다. 한 잔을 다 비울 때쯤이면 취기가 살짝 오른다. 약간 알딸딸해진 상태로 카를교를 건너고, 화약탑, 천문시계가 있는 광장까지 걷는다. 내가 취해서인지 다들 살짝 업된 모습 같았다. 지나가던 유럽인들과 즉석에서 사진을 찍고, 괴상한 포즈로 인증사진 찍는 대열에 끼어 놀기도 했다. 마침 방학 때 여행 온 한국 배낭 여행객들과 몰려다니면서 철없이 놀기 좋은 시절이었다.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파벨 아저씨 집으로 가는 길엔 근처 마트에 들렸다. 당시 맥주 브랜드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시절, 종류별로 맥주를 쓸어 담았다. 당시 우리나라엔 pet병맥주가 없었다. 그런데 프라하 마트에 가니 pet병맥주가 널리고 널렸다. 마치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그 병을 부여잡고, 일반 병맥주와 pet병의 가성비에 대해 생각하며 기뻐했다.
그 술을 사 가지고 와 냉장고에 넣고, 숙박 집 여행 동료들과 저녁 만찬을 준비한다. 소시지 야채볶음처럼 간편한 요리를 직접 조리했다. 그 외 안주거리들까지 일렬로 배치하면 저녁 식사 준비 끝. 먹고 마시고 떠들다 보면 자정에 가까워진다. 한 명씩 사라지면서 술자리는 조용히 마무리된다. 3일 연장 이렇게 놀다 보니 다음 여행지에서도 이렇게 안 놀면 제대로 논 것 같지 않았다. 마치 프라하가 내 여행의 매뉴얼이 된 것처럼 나를 조종하고 있었다.
이후 나는 남은 일정을 열심히 수행했다.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여행지를 지나 두 달 간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티브이를 통해 프라하를 만날 때면 프라하성이나 카프카 생가보다 파벨 아저씨 집이 먼저 생각났다. 그러다 다시 반가운 이름을 다시 만났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인도 여행을 갔을 때였다. 유럽 여행을 갔다 온 여행자와 얘기하다 익숙한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파벨 아저씨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있었던 시절만큼 호황을 누리지 못했지만, 아저씨는 여전히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얼마 전, 나는 검색 과정을 거쳐 유럽 여행 카페에서 익숙한 파벨 아저씨를 만났다. 아직도 아저씨는 민박집을 하고 계셨다. 에어비앤비에 검색하면, 예약도 가능하다고 한다. 갑자기 내 안에서 뭔가가 소용돌이친다. 그 소용돌이 내 심장 중심에서 빙글빙글 돌다 다시 나를 만난다. 어디로 떠밀릴 수도 없고, 떠밀려가는 것도 아닌, 가운데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고 있는 나의 현재.
나에게 청춘 시절의 여행이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소용돌이 같은 것. 그 바람에 휘청대기 싫어도 스스로 몸을 주체할 수 없는 격정의 시기라고 말이다. 나의 청춘은 더 이상 내게 없다. 내가 지난 온 곳에 차곡차곡 심어 두고 왔다. 그곳에 가야 실물처럼 나의 청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여행 중 나는 지금 다시 종로나 홍대 거리를 배회하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내 청춘과는 조금 다르다. 종로와 홍대를 누비던 20대의 나는 침울한 기억이 좀 더 많았다. 하지만 당시 여행 중인 나는 우울하면 우울한대로, 즐거운 즐거운대로, 그것이 마치 여행의 일부인 양 수긍했다.
여행 중 나는 사는 게 썩 괜찮은 도박 같았기 때문이다. 매번 수익을 얻을 수 없고, 가끔 동전 몇 닢 정도 건질 수 있지만, 게임 자체에 생을 걸었다. 빈털터리가 되어도 모험을 즐겼던 무모함이 날 것처럼 살아있던 시절이다. 불쑥불쑥 여러 감정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힘들었던 한국에서 청춘을 보냈던 나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청춘의 향을 비릿한 향으로 비유했다. 나에게 청춘의 시간이란 팔딱대는, 갓 잡아 올린 활어 같은 것. 활어를 토막 내 살점을 얇게 발라낸다. 통통하게 살 오른 흰 살점을 하나 입에 집어넣는다. 숙성된 선어가 아닌 활어로 만든 회는 좀 더 날 것 같은 비릿함이 살점에 배어 있다. 비릿하지만 탱탱한 맛이다. 그 살점에는 어떤 에너지가 응축돼 있다. 생을 버티는 근육 같다. 물컹한 지방 같은 것은 낄 수 없을 만큼 거친 파도에 대응할 수 있는 에너지로 가득한 살점. 그 기저엔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어 그물에 걸리고 만 활어의 청춘이 숨어있다. 내 청춘도 무수히 많은 그물에 잡혔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파벨 아저씨 집 후기에 달린 댓글이 눈에 들어온다. 2019년 가을, 누군가 그곳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파벨 아저씨도 변치 않은 모습으로 살아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