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와 꼰대의 역학 관계에 대하여
회식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아침방송이 끝나면 미친 듯이 술을 퍼마시고 집에 들어갔다. 그런 습성이 절로 생긴다. 다들 피곤했던 한 주간, 나를 위한 유일한 위로라고 할까? 또다시 반복되는 일주일, 꼼짝없이 또 일에 붙어있어야 하니 많이들 그랬다.
아침방송은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체력적으로 바닥을 치게 하는 고된 노동이다. 작가들도 대본 공장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글을 찍어내느라 바빴다. 바쁘고 힘들면 연대의식이 생긴다. 그 연대라는 것이 '메인'자 붙은 직책을 제외한 경우가 많다. 메인 작가, 메인 팀장을 제외한 서브들의 연대의식을 가히 놀라 정도로 강력하다. 나도 아침방송 서브 때 만난 이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 역시 뒤에서 메인 작가, 메인 팀장의 포지션에 대해 무자비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다들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메인 작가가 되었다. 처음 메인 작가가 됐을 때, 그때 나를 제외한 나머지 작가들은 이미 프로그램에 적응된 상태였다. 나는 처음이라 일도 그들에게도 적응하는 게 힘들었다. 게다가 우리는 서로를 경계했다. 그들은 기존 자신들의 틀을 유지하고 싶어 했고, 나는 고정된 틀을 깨려고 했다. 타협점을 찾겠다는 노력 없이 나는 슬슬 불도저를 가동할 준비를 했고, 그들은 되받아칠 산성을 쌓기 시작했다. 일종의 알력 다툼 같은 것이다. 워낙 강하게 대치하고 있어, 그들과 나의 대화는 도통 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고집을 부린다. 결국 이 상황을 보다 못한 메인 팀장이 중재에 나섰다. 도대체 왜 그러냐며 뭐가 문제냐며 적당히 마무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와 그 서브작가의 대치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부정확한 표현에 대해 언급했고, 서브작가는 영상 그대로를 쓴 것뿐이라고 했다. 결국 담당 피디까지 나서서 대본을 정리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메인 팀장은 방송 끝난 후, 나를 불렀다. 그렇게 깐깐하게 굴 것 없다고 조언했다. 서브들하고도 적당히 잘 어울려야 한다고 말이다. 메인 팀장은 오랜 기간, 그 팀을 이끌어왔기 때문에 서브 작가들과도 친하다. 당시 나는 굴러들어 온 돌 입장이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겉에서 봤을 때 메인 팀장은 후배들과 잘 지내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친절하고, 후배들에게 술과 밥도 잘 사주고, 얘기도 더 잘 통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팀원들 사이에서 둥둥 뜬 기름처럼 주어진 일만 했다. 입을 닫았다.
그런데 어느 날, 메인 팀장의 분노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강타했다.
메인 작가와 메인 팀장을 완벽하게 왕따 시키고, 서브 작가와 코너 피디들끼리 엠티를 갔다고 한다. 팀장은 자신을 빼고 갔다는 점에서 굉장히 서운했던 모양이다.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나를 빼고 지들끼리만 놀러 갔다고?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목소리엔 분노와 서운함이 교차했다.
나는 메인 팀장이 나가고 난 후, 후배들에게 한 마디 했다.
그들은 이런저런 변명의 말을 늘어놓긴 했지만, 이유는 단 하나. 메인 팀장과 메인 작가를 데리고 가면 분위기 망치니까. 우리가 없어야 자신들이 편하게 놀 수 있으니까. 그뿐이다.
나는 그때 문득 자리가 올라갈수록 꼰대가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외로움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으니 한 번 말에 발동이 걸리면 멈출 줄 모르고, 떠들어댄다. 대구가 없다 보니 결국 자기 우월성을 드러내는 얘기까지 파고든다. 그러다 보니 후배들은 귀를 막는다. 일방적인 소통의 총알받이가 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신입들은 아예 기피를 한다.
예전에 나의 팀 메인 작가도 사무실에서 돌아가는 일에 대해 항상 궁금해했다. 잠깐 오는 메인 작가와 매일 출근하는 나 같은 막내는 팀원들과의 친밀도에 있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언니는 피디들이 나와만 친해지는 걸 경계했다. 사무실에 일어나는 사소로운 일에도 관심을 가지며 나를 경계하기도 했다.
결국 꼰대와 직위 상승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꼰대로 더 비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메인 팀장의 반응은 너무 촌스러웠다. 자신의 감정을 그렇게 많이 내비칠 필요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해가 간다. 친한 이들끼리 즐긴 것뿐. 게다가 회사 밖인데 뭐가 문제일까?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 직위 상승이 마냥 좋은 것만이 아니라는 걸. 파티션에 갇혀 홀로 고독을 씹고 있는 본사 부장들이 생각났다. 꼰대 소지가 높은 자리를 지키다 보면 행복의 씨가 말라버린 기분이 들진 않을까.
예전에 한 출연자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뭔가 감정을 메말린 것 같다고. 꼰대 기질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결국 나는 입을 다무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러다가 한 마디 하면, 집에 가는 길에 막내에게 전화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