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가 일깨워주는 지난 청춘의 기록
나의 옷에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나의 신발에선 어떤 냄새가 흐를까. 누구나 사람마다 자신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지독한 냄새를 풍기든, 향기로 승화되든, 평생을 따라다닌다. 그 냄새에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과 감각들이 합친 무언의 기록이다. 기록되는 과정에서 여러 층위의 냄새들이 뒤섞이는 화학 작용이 발생하는데 그 과정을 거쳐 하나의 스토리가 완성된다. 개인차도 커서 누군가는 매일 다른 향기를 입고, 누구가 특화된 자신만의 냄새를 지닌 채 바꾸지 않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맡고 싶은 냄새만을 맞는 게 아닐까. 그렇게 자신만의 후각을 키워간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후각당 여러 개의 스토리가 생긴다. 스토리가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사건이 먼저일까, 주인공의 성격이 먼저일까. 스토리의 첫 테이프 커팅은 사건이다. 하지만 사건의 발생하는 원인 제공은 바로 주인공의 성격이다. 감각의 예민 정도에 따라 다양한 스토리가 발생한다. 그 스토리들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는 각자의 연대기를 만들어간다.
그중 후각은 기억을 담당한다. 유난스럽게 냄새에 반응하는 나에겐 더욱 그렇다. 어떤 향이 코끝을 스치기만 해도 나의 후각은 강하게 내게 얘기한다.
'어때? 어릴 때 엄마 치마에서 나던 그 냄새 같지 않아?'
반찬 냄새, 밥 냄새가 뒤섞여있던 엄마 냄새를 맡은 그 시절로 돌아간다. 아마도 엄마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6살 된 아이는 두 살 많은 언니와 방에서 놀다가 갑자기 엄마가 그리워졌다. 그때 아침에 엄마가 벗어놓고 간 치마를 들고 온다. 냄새를 맡는다. 엄마가 곧 올지도 몰라라고 나를 위로한다. 그 냄새는 단순히 엄마 냄새가 아니라 아이의 그리움을 담은 하나의 정서가 된다.
30개월이 넘은 둘째는 항상 엄마의 배를 부여잡고 잠이 든다. 엄마의 배꼽을 만지고 비비면서 정서적 안정을 취한다. 그래서인지 한때 자주 했던 말이 있다.
"엄마 배꼽 냄새"
이 말을 하면서 키득키득 웃는다. 엄마 웃기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아이는 지금 자신의 하는 말들이 나중에 기록될 것이다. 후각이라는 생의 감각으로.
**
볕을 머금고 있는 노란 은행잎에선 풋풋한 향기가 난다. 마치 푸성귀에서 나는 덜 여문 그 냄새와 유사하다. 이미 세 계절을 떠나보내고, 생을 저버렸지만, 은행잎은 책갈피 속에 다시 생을 이어갈 수 있다. 한때 단풍 든 잎들을 주워 시집 사이사이 껴두던 큰언니의 푸른 계절을 떠올린다. 책 속에서는 가끔 비릿한 풀냄새가 났다. 바람에 휩쓸려 생을 마감하는 길거리의 낙엽과는 달리, 사춘기 시절의 언니처럼 책갈피 속 낙엽들은 그곳에서 다시 꿈을 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찬란한 봄을 기다리는 식물들의 마음처럼. 나는 그들의 야망(?)을 눈치채지 못한 채 시를 읽어 내려갔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일 때도 있었고, 김소월의 '진달래꽃'일 때도 있었다. 큰언니 역시 시집 속에 그 꿈을 숨겨놓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 습관을 이어받아 나 역시 낙엽의 운명을 응시했다. 그때 나는 청춘이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청년이 되기 전에 아이들은 가끔 청소년으로 살거나, 아직 어린아이처럼 군다. 중학생이었던 우리 무리들은 그 사이를 오가며 추억을 쌓아갔다.
늦가을, 학교 정문 옆에 곱게 물든 은행나무는 이파리가 무성했다. 가을이 되자, 노란빛들로 물든 바닥은 마치 노란 볕이 드리운 그림자 같았다. 우리는 그때 밝은 그림자였다.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어린싹처럼,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어린잎처럼 덜 자란 상태였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생의 모든 감각들을 깨웠다. 우릴 보고 지나가던 어떤 어른이 한 마디 한다.
"좋을 때다. 지금이 가장 좋을 때야"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가끔 은행잎을 수집했던 그날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때 우리는 은행잎처럼 3개의 계절만을 가졌던 것 같다. 사계절을 채우지 못한 미완의 생을 경험했던 건 아닐까.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지 않았던 우리에게 노란 은행잎은 생이 마감하려던 최후였다. 바삭 타들어갈 정도로 자신을 말려야 하는 낙엽의 고통을 몰랐다. 그래서 더 쉽게 절망했을까? 아직도 낙엽은 여전히 내겐 풋풋한 향기로 남아있다. 풋풋한 시절에 풋풋한 기억이다.
***
이제는 더 이상 내게 어떤 자극이 되어주지 못한 맥주 향에 대해 논한다. 내 청춘의 팔 할은 맥주와 함께 했다. 그윽한 보리 향은 내게 생동감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그 향에 취하면, 때론 나는 호기롭게 생을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이제는 거품 빠진 맥주처럼 그 기운을 잃어버렸다. 구수하기도 하지만, 시큼하기도 하고, 달달하기도 했던 그 향은 이제 내 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 그것이 때론 아쉽기도 하고,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아 슬플 때도 있지만, 맥주는 곧 방황의 상징이었기에 어떤 면에선 안도한다.
청춘의 향은 깊이가 없는 대기업의 흔한 맥주 향과 닮았다. 가끔 내 청춘이 그리울 때 맥주 향을 떠올린다. 그 향이 주는 어떤 메시지를 해독해본다. 그 시절 나의 마음을 괜히 되돌아본다거나 잃어버린 얼굴들과 그들의 목소리에 대해 기억을 복기시켜본다. 그들에게서 맡은 냄새는 내게 어떤 정서로 가공됐을까?
이런 사사로운 감정들은 후각을 통해 나를 일깨운다. 지금 나는 어떤 후각을 키우고 있을까. 그것이 또 어떤 스토리가 되고, 어떤 계절 위에 놓여있는지는 결국 세월이 지나서야 알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