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민낯에 대하여
영화 기생충을 봤을 때 나는 가난의 민낯에 대해 생각했다. 가난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듯 성격도 다양하다. 어떤 가난은 비굴하지만, 어떤 가난은 당당하고, 또, 어떤 가난은 위협적이다. 가난의 다양한 이유만큼이나 그 얼굴도, 성격도 제각각이다. 하여, 가난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을 가져다준다.
가난하다는 건 절대적이기도 하지만 결국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가난 속에 있으면 비참함이 덜하지만, 상대적인 가난을 겪을 때는 비참함도 그 배가 된다. 가난하기 때문에 인간의 성격도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 영화 '기생충'의 가족들도 가족 구성원마다 가난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고, 성격도 다른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찾아든 가난은 성격도 바꾼다. 문득 유머감각이 뛰어났던 대학 동아리 대선배가 생각났다. 어느 날, 까마득한 후배 직장 앞으로 대선배가 찾아왔다. 선배는 90년대 초반 학번이고, 후배는 90년대 후반 학번이다. 후배는 공무원이다. 따라서 선배가 후배의 직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직장 앞 식당에서 선배를 만난 후배는 적잖이 당황했다. 선배의 눈빛은 이전에 그가 알던 눈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배에게도 그 자리가 익숙지 않던지 말하는 내내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쪼르륵 흘러내리면, 마치 눈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배는 졸업 후 취업이 잘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몇 년 전, 집 근처에서 문방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배는 보험설계사로 전향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선배의 회사는 b급 보험회사였다. 인지도가 낮아 고객을 유치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선배는 사랑하는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을 생각하면, 하루라는 시간을 그저 흘려보낼 수 없었다. 가족을 생각하며 선배는 동아리 명부를 뒤적였을 것이다. 후배의 직장으로 당일 오전, 전화해서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가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배는 보험 가입을 그 자리에서 단칼에 거절했다. 선배도 이해한다고 했다. 당일 점심은 후배가 냈다. 후배는 자신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식사 후 선배는 가볼 곳이 있다고 했다. 선배의 모습을 뒤로하고, 후배는 직장으로 복귀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는 후배에겐 과거, 가난의 시간들이 더 이상 그립지 않았다. 선배가 여전히 그 시간 속에 매몰돼 있는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대학 시절, 우리는 모두 가난했다. 가난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젊었기 때문이다. 졸업 후의 걱정은 뒤로하고, 가난하지만 소소한 낭만을 즐겼던 우리들에게 그때 가난은 추억이 됐다.
하지만 졸업 후, 각자 취업을 하면서 빈부 차이가 생겼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았다. 다들 현재를 버티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가난을 대하는 방식이다. 가난의 굴레 속으로 진입하기 않기 위한 노력. ㅂ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어느 햇살 좋은 주말 아침. 선배는 지인들과 야구를 하고 있었다. 그날, 햇빛은 유독 따가웠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고 한다. 그날따라 선배는 공을 자주 놓쳤다. 그러다 갑자기 펜스를 맞고 튕겨나간 야구공처럼 순식간에 이 세계에서 유성처럼 사라졌다. 그 전 과정을 지켜본 선배의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아빠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호기롭게 가난을 던져버릴 수 없다. 오히려 몸에 덕지덕지 붙은 가난이 반지하 냄새로 후각화되는 순간, 가난의 실체는 명확해졌다. 21세기 신자유주의의 폐허가 절정에 이른 현재, 가난은 이제 부끄러운 감정 상태를 뜻한다. 가끔 가난은 치고 올라와 나를 공격한다. 그리하여 가난은 오감을 자극한다. 공감각화 된 가난에 도취되어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외면할 수 없더라도 치고 나와야 하는데 선방을 때리지 못한다는 게 핵심이다. 가난의 핵심은 무기력. 무기력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개인의 힘만으론 부족하다.
영화 후반부에 나온 생일파티 사건은 이 모든 상황을 냄새로 정리했다. 자진모리장단처럼 빠르게 사건이 진행된다. 일련의 준비된 스토리들이 장단에 맞춰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나는 가난의 민낯이 드러나는 것 같아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영화 속 모스부호는 마치 가난의 신호 같다. 나의 가난을 외부에 알리지만, 나는 구출을 원하지 않는다는 양극단적인 감정. 지하방 그 남자는 '사장님께 집에 살게 해 주셔서 고맙다'는 신호로 모스부호를 날리지만, 집주인은 알 턱이 없다. 그럼에도 가난은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자신의 가난이 타인에게 쉽게 읽히게 하고 싶지 않다. 더불어 기화 상태로 사라진 나의 지난 가난과 지금도 상대적인 가난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현재의 나를 살펴봤다. 가난의 기억이 휘발성도 크지만, 그 흔적도 깊다.
온 가족이 와서 집주인 거실에 모여 술을 마신 그 흔적 자체가 가난이 되어버린, 우리 시대 슬픈 자화상. 영화 기생충에 아카데미가 열광했는 이유도 바로 빈부격차가 아닐까. 세계적으로 빈곤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이제 인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야 한다. 빈자와 부자의 공존이 21세기 새로운 생존 방식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