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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편하면, 상대도 불편하다

20대 초반, 미숙한 감정처리가 일으킨 불편함이라는 오만함에 대한 소고

by 델리러브

대학 입학하자마자 같은 과 동기 4명과 함께 몰려다니게 됐다. 나까지 포함해 5명이 무리 지어 다니는 풍경은 생각해보면 좀 기이했다. 우리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고, 성인의 나이에 직면해있었다. 과 특성상 각자 개개인의 플레이가 뚜렷했던 분위기에서 5명이 몰려다녔다. 당시를 생각해보면, 몰개성을 스스로 설파하고 다니는 꼴이라고나 할까. 자체 공강을 하고, 낮술을 마시며, 술 먹고 개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독특한 자신만의 개성과 취향이고픈, 어린 청춘들의 객기가 난무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방황을 혼밥과 혼독으로 이어가던 과 동기들이 늘어나는 추세와 역행하던 당시 우리 무리들. 우리가 개떼라고 불리기 시작한 건, 한 동아리를 함께 가입하고부터였다. 공대생들이 바글대던 캠퍼스에 여자 5명의 무리가 한 동아리에 우르르 몰려갔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게다가 문학에는 관심도 없던 애들이 절반 이상이었던 상황에서 어떻게 당시 우리가 그 동아리에 가입하게 됐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소설과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세미나를 하는 동아리였다. 우리보다 한 학번 위 선배가 세미나를 주도했다. 나는 세미나 때마다 귀에 뭐가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내용들이 거슬리고 불편했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못한 건 우리 시대, 청춘 드라마의 영향일 수도 있다. 무리 중 한 명이 동아리에 가입할 때 이런 말을 했다.


" 동아리라는 평생 함께할 수 있는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당시 이병헌을 좋아했고, '내일은 사랑' 드라마에 빠졌던 친구는 모임의 성격, 사람들의 성향을 따지기 전에 단 하나의 모임, 인간관계가 절실했다. 그 꿈을 대학 동아리에서 이루고 싶어 했다. 대학 동아리에 대한 환상은 '내일은 사랑'. '우리들의 천국' 같은 청춘 드라마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강의가 끝날 무렵이었다. 해지기 직전, 동아리 창밖을 응시하던 동아리의 한 선배가 인문관에서 나오는 우리 무리를 발견한다. 떼 지어 몰려다니는 무리 중 단 한 명만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것까지 확인한다. 나머지 네 명은 동아리방으로 향한다. 학기 초 한 명은 재수를 한다는 이유로, 자퇴와 함께 우리 무리를 자연스럽게 탈퇴했다. 한 명이 빠지자 나머지 한 명이 흡수됐다. 강가에 그물을 펼쳐놓지도 않았는데 고기가 수중에 들어온 격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친해진 건진 모르겠지만, 어찌어찌하여 우리 무리에 들어왔다.


그 친구는 자유의지가 강렬했고, 그녀의 커뮤니티는 교회만으로도 충분했기에 또 다른 모임은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방황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신앙의 길로 인도하고자 했다. 물론 나는 더 이상 종교가 개입할 수 없는, 망나니 자세를 탑재하고 있었으므로, 친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론적으로 5명에서 4명만이 동아리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왜 우리가 친해진 걸까. 이들의 특징을 생각해보았다. 소심했고, 감정적으로 예민했고, 자존감이 낮았다. 이 중 그나마 나은 친구가 그룹의 리더가 된다. 처음엔 나인 줄 알았으나 결국 내가 아니었다.


소심과 예민으로 뭉친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는 방법도 소소하다.


"오늘 화장 잘 받는다"

"너는 핑크가 어울려"

"이 귀여운 것... 남자들이 왜 이런 애교를 몰라주는지 몰라"


의상과 화장, 헤어 스타일을 스캔하고, 서로를 칭찬해주는 분위기는 나로 하여금 오히려 유니섹스적인 면을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외모 칭찬 일색인 그 분위기가 나는 어색했다. 생각해보면, 외모에 관심 많은 나이 때이니 자연스러운 대화일 수도 있다. (과 동기 중엔 한 명은 평소에도 블랙 롱드레스도 입고 다녔다.) 당시 그 정도의 꾸밈은 꾸민 것도 아닌데 말이다.


외모에 집중하는 대화도, 서로가 서로를 매번 칭찬해주는 분위기도, 솔직히 나는 불편했다. 칭찬도 받아본 사람이 잘 받아치고 남들도 칭찬해주는 법. 칭찬과 거리가 먼 생을 살아온 나에게 그런 상황은 단지 닭살 돋는 풍경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나는 점점 일탈을 꿈꾸기 시작했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메인 모임을 그들과 함께 한다면, 부수적으로 원 바이 원 씩으로 인간관계를 넓히려고 노력했다.


나의 의지를 눈치챘던 친구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지켜봐 줬다. 그때 나는 그들과의 관계를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물론 이건 완벽한 나의 오산이다. 나는 떠돌았고, 그들은 그들끼리 끈끈한 연대를 이어갔다. 나는 밤새 다른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사람들 주변을 떠돌았다. 그들은 그들끼리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밥을 먹었다. 나는 인사동과 강남, 종로를 배회하며 청춘을 소비하고 다녔고, 그들은 학교 앞 분식집이나 카페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속 깊은 관계를 이어갔다. 이미 그때부터 그들은 나를 마음 속에서 밀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쟤는 우리랑 달라"


나라도 그런 선택을 했을 것 같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너희들과 함께하는 무리가 너무 불편해~라고 행동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동아리 활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아리 활동에 매진할 수 없다는 인상을 깊게 심어준 덕에 나는 동아리에서도 주목받지 못한 인물이 되었다. 성실하게 세미나에 참석하며 방학 중에도 100% 출석에 빛나던, 우리 무리 중 한 명이 동아리를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당시 나는 한없이 오만했다. 내가 저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지식적으로도 더 풍부하다며 비웃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울 지경이다.


결국 졸업 후, 우리는 애써 연락하는 사이로 연결되지 못했다. 무리 중에 나만 멀어졌다. 한 때 우리 무리였으나 나보다 결국 나머지 3명과 더 친해졌던, 신앙이 깊던 친구는 부천에 사는 대학 동기에 의해 재회하게 되었다. 가끔 톡으로 연락을 하거나 셋째 출산에 맞춰 출산용품을 보내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좀 다르다. 그 친구는 자주 연락을 하지 않아도 다시 만나도 편한 관계다. 그런데 나머지 3명을 다시 만나면 좀 많이 불편할 것 같다. 그들도 당시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가 불편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불편했고, 그들은 내가 불편했다. 더 이상 연을 이어가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 시절, 미성숙한 나는 알 턱이 없다.


졸업 후 몇 년이 지난 후, 한남동 버스 정류장에서 무리 중 한 명 친구가 서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당시 나는 집으로 가던 버스 안에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 버스가 정차했을 때 안에서 소리치며 인사를 할 수도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우리는 길 가다 스치는 사이가 되었다. 애써 아는 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가 되었다. 기억할 수도 있고, 기억하지 않아도 절대 이상하지 않는 관계. 우리는 서로에게 잊힌 사이가 되었다.


불편한 관계는

결국 미숙한 나의 감정 처리를 기반으로 이뤄진다.


관계는 결국 성숙한 자아들의 만남이다. 한쪽이라도 미숙하며, 기울어진 저울처럼 더 이상 동등하게 서로를 마주할 수 없다. 저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서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한다는 건 미숙함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노력을 통해 관계가 이어간다. 물론 노력했는데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다.


당시 나는 그들이 싫다기보단 미숙한 감정 처리가 문제였다. 나는 감정을 불편하지 않게 드러내는 능력이 부족했다. 결국 불편한 감정을 키워간다는 건 스스로가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조금 불편해도 적나라하게 감정을 드러낸다면, 어느 관계가 오래 지속될까. 성숙한 인간관계는 조금 불편한 감정들도 속으로 삭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나의 20대는 상처투성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나마 이어진 관계들은 내 부상투혼으로 건진, 힘겨운 노력의 대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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