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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Nov 19. 2020

덕후아들 덕에 부엌살림이 남아나질 않네

사슴벌레 사육장이 된 아들의 방

어릴 때부터 부엌으로 침입해 냄비며 조리도구들을 빼와 장난감으로 사용하던 첫째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둘째가 형에게 배워 부엌살림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최근 사슴벌레 덕후가 된 후, 방과 거실 구분 없이 밀폐용기들이 돌아다닌다. 그 안을 열어보면 곤충 피규어나 사슴벌레 종이인형이 있다. 머리가 아찔하다. 하지 말라고 해서 들은 아이들이 아니므로, 최대한 쓰지 않는 그릇들로 교체해준다. 수박통은 아예 포기했다. 랩에 씌어 보관하면 안 된다고 해서 구입했는데 1+1으로 판매하던 거라 집에 2개나 있었다. 하지만 첫째, 둘째에게 하나씩 내어주니 수박은 그냥 랩에 씌어 작은 사이즈는 최대한 빨리 먹거나 큰 사이즈는 네모로 썰어 밀폐용기에 보관한다.



7년간 덕후아들을 키우다 보면, 내성이 생긴다. 아이가 뭔가에 빠지면, 일단 관련 피규어부터 사준다. 그리고 중고 온라인 매장을 뒤져 다량으로 구매한다. 이번엔 친정집에 갈 때 근처 알라딘에서 관련 책을 여러 권 사줬다. 아이는 곤충 책은 싫다고 거부했다. 한때 무당벌레에 빠졌을 때 사둔 곤충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사슴벌레, 사슴벌레가 없다면 장수풍뎅이 책을 사달라고 했다. 부모는 따를 밖에 없다.



확실한 취향을 가진 아이다. 군더더기가 없다. 그런데 예민한 성격이다. 감정적으로 예민해서 어떤 자극에도 크게 반응한다.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격렬하게 온 몸으로 표현한다. 어릴 때는 이런 아이의 성향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다. 그런데 커가면서 아이의 예민각도 조금씩 깍이는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자기 영역에 동생이 침범하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그래서 둘째는 매일 운다. 서럽게 울 때마다 아이를 달래면서 첫째를 나무라지만, 무조건 첫째가 잘못했다고 몰아세울 수도 없는 상황도 많다.



그러다 첫째의 취향에 둘째도 무임승차한다. 사슴벌레가 좋아졌다는 둘째는 형을 쫓아다니면서 같이 놀려고 한다. 잘 놀다가도 틀어지는 게 형제간이라 이래저래 간섭할 수도 없는 일. 그런데 부엌에서 꺼낸 용기들로 거실을 채우기 시작하자 평화의 시간이 도래한다. 그러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밀폐용기 안에 사슴벌레가 네 것이냐 내 것이냐로 설왕설래를 이어가다 첫째의 감정으로 일단락을 마무리한다. 다시 또 평화의 시간이다.



이럴 때 엄마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고 싶다. 하지만 계속되는 엄마의 소환. 엄마 같이 놀자를 반복하는 두 아이. 엄마는 반반씩 나눠 첫째, 둘째와 동시에 논다.  반쪽으로 첫째와 사슴벌레 얘기를 하다가 곤충 카드로 대결 놀이를 한다. 반쪽으로 엄마에게 몸을 던지는 둘째를 받아주면서 논다. 정신이 왔다 갔다 한다. 엄마의 정신은 어디로 흐르는 걸까.



덕후아들 키우는 건 쉬운 듯 어렵다. 집요하게 물어보는 아이의 질문에 공부가 필요하다. 어제는 둘째가 낮잠 잘 때 BBC 다큐 '아프리카'를 봤다. 영어 내레이션이지만, 한글 자막을 활용해 내용을 이해하는 첫째. 덩달아 엄마도 신나게 봤다. 인간이야말로 지구 상에서 가장 민폐를 끼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방대한 지구 생물들, 그중에서도 아프리카를 이해하는 길을 어렵다. 여기는 아직 원시적인 미가 살아있는 것 같다.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를 때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단순하지만 치열한 지상의 모든 생물들의 삶. 모든 생존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슴벌레 이후 아이는 어떤 덕질을 하게 될까. 잘은 모르겠지만, 가끔은 좀 미안한 감이 든다. 집에서 티브이를 보지 않고, 스마트폰 게임에 노출되지 않는 상태인 아이. 유치원에서 또래들과 어떻게 잘 어울리고 있는 걸까? 유치원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게 많다. 그곳 아이들은 미스터 트롯에 나온 가수의 노래도 꽤 뚫고 있고, 또래 사이에 유행하는 게임에 대해서도 능통하다. 그쪽엔 거의 무균 상태인 우리 아이는 잘 어울리고 있는 건지 심히 걱정이 된다. 예전 티브이에서 인공조미료 없이 집밥만 먹은 아이가 학교 급식을 먹었더니 아토피가 생겨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는 걸 봤다. 대중매체의 노출이 거의 없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사실 잘 모르겠다. 물론 아이는 티브이를 틀어주면 매우 좋아한다.



일단 아이의 취향을 존중해주자. 내년에 입학하면, 아이는 또 다른 세계에 진입할 터이니. 엄마는 그저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어주는 수밖에. 초등 1학년이 가장 바쁘다던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해주고 싶은 건 많은데 사슴벌레가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동네 친구들과 집 앞 골목에서 놀다 또 그렇게 하루가 가던 그 시절이 얼마나 평화로웠는지 새삼 떠올린다. 아이는 사슴벌레와 잠시 잠깐의 추억을 쌓고 있다. 옆에서 말동무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게 엄마의 몫임을 안다. 이렇게 아이와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한 시절을 함께 음미하고 있다.



친구랑 함께 접은 종이 사슴벌레들



밀폐용기 안에 개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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