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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Nov 22. 2020

사슴벌레 키워? 말아?

동물을 키우기엔 아직 엄마는 준비가 덜 된 것 같아..

나는 드디어 긴 고민 끝에 결심을 내렸다.



"그래, 사슴벌레를 한 번 키워보자"


항상 동물 키우기에 긍정적이었던 남편이 말을 보탠다.


"아이가 나중에 신해철이 만든 '날아라 병아리'처럼 그런 감수성의 노래도 만들 수도 있잖아"


남다른 예민각을 가진 첫째,. 좀 더 자신의 각을 깎아 세상과 부드럽게 각을 맞춰가는 방법  중 하나가 사슴벌레 키우기가 아닐까.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부모의 예상과는 달리 아이는 사슴벌레를 키우기 싫다고 극구 거부했다. 이유를 물어봤더니 예상외의 답변이 나왔다.


"죽으면 어떻게 해?"


아이는 사슴벌레를 키우다가 죽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게 걱정이었나 보다. 나는 다시 한 발짝 물러섰다. 어쩌면 예전에 달팽이 키울 때 나와 큰언니가 한 얘기를 듣고, 저렇게 반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늘은 후퇴하자라며 더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궁금했다. 정말 사슴벌레의 죽음이 걱정돼서 키우기 싫다는 것일까? 어제 하원하는 길에 다시 한번 물어봤다.



"왜 사슴벌레 키우는 게 싫다고 한 거야?"


아이는 잠깐 생각하다 드디어 속내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 그럼 나 유치원 못 가"

"유치원을 왜 못 가?"

" 계속 같이 있어야 돼. 엄마도 일하러 나가면 안 돼.

   계속 봐야 돼.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해"



아, 사슴벌레를 키우면, 옆에서 계속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키울 수 없다는 이유였다. 아이의 속마음은 이런 거였구나 생각하니 피식 웃음만이 나오지 않았다. 진짜 어찌어찌하여 사슴벌레를 키우면, 초반 적응 기간 동안 엄마에겐 외출 금지가 내려질 것이고, 우리 집은 외출할 때 사슴벌레를 동반해서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관심들이 지속적으로 계속되진 않겠지만, 일단 처음에 호들갑을 떨어야 할 정도로 사슴벌레 홍역을 호되게 치르게 될 것이다. 일단 아이에게 더는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나 역시 어떤 생명체이든 죽음을 목격하고 싶지 않다. 하물며 키우던 곤충인데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키우기 전부터 걱정이 앞선다.



친정집에 갔더니 언니가 집 근처 도서관에 가면, 토끼 가족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누군가 토끼를 버린 것 같다고 하는데, 어미 토끼와 작은 새끼 토끼가 산다는 것이다. 10년 전 토끼를 키우다 무지개다리로 보낸 큰언니는, 그 경험 이후  세상 모든 토끼들을 각별하게 대한다. 어느 날, 토끼에게 먹이를 주는데 어떤 아줌마가 오더니 검은 토끼 한 마리가 더 있다는 것. 그리고 시청 광장에 사는 토끼 가족은 이미 그 동네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유기견이 아닌 요새는 유기 토끼들이 많다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버려지는 건 누구에게나 상처이다. 그럼에도 토끼들은 야생 습성 그대로 산속에서 적응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집에 갇혀 사는 것이 좋은 건지, 아예 산속에서 적응하며 사는 것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 우리에 가두지 않으면 토끼들은 집안의 전선줄이며 나무들을 다 갉아댄다. 결국 사고뭉치가 되어 다시 우리 속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토끼에겐 가혹한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만이 감정이 있는 걸까? 토끼의 환경이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사실 나는 사슴벌레뿐 아니라 동물을 집에서 키우는 걸 꺼려한다. 가장 큰 이유는, 하나의 생명체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물론 그 생명체가 나를 돌봐주고,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집에 데리고 온다는 건 부자연스러운 것 같다. 인간의 집은 태초에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과는 다른 곳이다. 물론 그들도 농장이란 곳에서 태어나 인위적인 환경에 적응하며 살았으니 과도한 반응일 수도 있다. 원시 자연환경에 한 번도 적응해 살아본 기억이 없는 놈일 수도 있으니까.



문득 예전에 어쩔 수 없이 달팽이를 키워야 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결국 하늘로 보내야 했던 경험이 생각났다. 우리가 키우던 사슴벌레가 어느 순간, 죽음을 맞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두려운 감정이 앞선다. 동물을 키운다는 건, 아직 내겐 낯선 경험이다. 나는 그 어떤 죽음도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성향을 지녔으며, 우리 아이도 엄마처럼 예민하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 사슴벌레를 키우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내가 동물을 키우기에 시기가 적절하다고 보지 않는 이유는, 동물들에게 지금 나의 환경이 최적의 환경인지. 최선의 환경인지 모르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이다. 그리고 내가 동일하게 그들을 애정으로 대할 수 있을지 나를 의심한다. 사실 좋은 주인을 만나 잘 적응해서 산다면 나쁠 것도 없다. 강아지나 고양이도 지금의 자연 생태에선 먹고사는 게 더 힘들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항상 동일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서 가끔 변덕을 부린다. 그럴 경우, 그들은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적응해야 한다. 나도 나중에 마음이 변해 저들을 애물단지 취급하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언니가 지난여름, 길 건너 아파트 단지에서 사슴벌레를 봤다던 목격담이 떠올랐다. 사슴벌레가 아파트 단지에 있는 나무에 산다는 건 기이한 일이다. 참나무나 상수리나무, 졸참나무에서 산다는 사슴벌레가 어떻게 느티나무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 이 역시 누군가 버린 흔적이 아닐까? 얼마 전 아파트 카페에 사슴벌레를 무료로 준다는 글도 올라왔다. 사실 키우기로 작정했다면, 그 사슴벌레를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가져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 사슴벌레를 구입한 가족들도 준비가 덜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산속에 풀어주려고 데려갔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서 다시 데리고 왔다고 한다. 아이가 좋아서 구입했는데 막상 키우려니 아이가 거부하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마음이 여린 분들이라 산속에 두고 오지 못하고, 다시 들고 와서 카페에 글을 올렸고, 다음날 아파트 입주민 중 한 분이 그 사슴벌레를 데리고 갔다.



누군가는 말한다. 동물을 키운다는 건 아이의 정서에 좋다고. 곤충 역시도 키우게 되면 배울게 많다고.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들을 꼭 눈앞에 데려와야 하는가. 어쩌면 인간의 이기심 아닌가. 내 아이에게 좋다고, 내게 좋다고, 일방적으로 데리고 왔다가, 결국 싫증 나면 버릴 수도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 세상에 많은 반려동물들. 물론 애정으로 키우는 분들도 많다. 하지만 호기심에 키웠다가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그들은 버려지고, 버려진 동물들이 도시를 배회하는 반복적인 불편함.  



그리하여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슴벌레를 키우는 것도 신중할 수밖에 없다. 아이의 마음이 변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판단을 유보한다. 물론 나도 나중엔 키울 수 있다.

(동물이 사는 세계는 놀랍고도 인간에게 꽤나 위로가 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는 걸 알기에...)


이는 나중에 해외여행을 가면, 예를 들어, 태국 치앙마이 코끼리 투어라든가 인도 타르 사막의 낙타 투어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결심과 동일선상에 있는 감정이다.


그리하여 사슴벌레는 아직 우리 집에 살지 않는다.

종이 사슴벌레들만이 집 안에서 아이와 힘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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