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날 내려가 만난 어릴 적 친구에 대한 단상

[아침음악] Chopin의 Études Op.10

by 메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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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내린 비가 그쳤다. 하늘은 여전히 낮은 구름에 가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제가 경칩(驚蟄)이었다.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이 천둥소리에 놀라 땅에서 나온다는 시기이다. 어제부터 내린 이 비가 바로 그 잠을 깨우는 봄의 전언인가 싶다.


어제 아침, 문득 불알친구가 생각났다. 모처럼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 혈압약을 처방해 주는 친구를 만나러 천안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친구를 만나 처방을 받고 인근 한식 뷔페식당에서 점심을 같이했다. 식사하며 우리는 서로의 어머니 안부를 물었다. 친구와 나, 둘 다 아버님을 여읜 지 꽤 되었기에 홀어머니를 두고 있다는 공통된 분모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이에는 서로 묻지 않는 아픈 일이 있다. 나에 비하면 친구의 아픔이 훨씬 깊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나는 동생을 잃었고, 그는 자식을 잃었다. 비할 바가 되지 않는 그 상실의 무게를 알기에 묻지 않아도 친구의 눈을 보며 그가 잘 견뎌내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말 대신 식사에 집중하며 그저 곁에 있어 주었다. 대상포진으로 고생 중이라는 또 다른 친구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무거운 침묵의 자리를 대신했다.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아메리카노, 친구는 달달한 음료를 마셨다. 화제는 골프로 옮겨갔다. 친구는 지난주부터 필드에 나갔는데 상태가 엉망이라며 투덜댔다. 친구는 조인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혼자 골프를 즐긴다. 아픈 일이 있었던 해부터 일 년간은 채를 놓았으나, 그 이후로는 다시 혼자 다닌다. 가끔 나도 함께 가지만, 그는 골프라도 해야 잠시나마 아픔을 잊고 숨을 쉴 수 있는 듯 보였다.


비대면 진료 정책에 대한 불만 섞인 이야기도 오갔다. 코로나 시기와 달리 제한이 많아졌다며 투덜대는 친구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우리는 정치 얘기는 하지 않는다. 서로 지지하는 진영이 다르기 때문이다. 젊은 날, 서로의 후보를 지지하다 빈정이 상해 몇 달간 연락을 끊었던 기억이 있다. 이제 나이가 드니 소위 ‘긁히는’ 주제는 피하게 된다. 이 나이에 언쟁하는 것도 꼴사나운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처방전을 받아 서울로 올라오는 길, 과식 탓인지 졸음이 밀려와 쉼터에서 한참을 잤다. 차 안에서 음악을 듣다 보니, 무작정 내려가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사함이 밀려왔다.


오늘 아침 공기가 꽤 쌀쌀하다. 산책길에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작년 이맘때는 눈이 왔었다. 아직은 동(冬) 장군이 물러나기 싫어 고집을 부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거대한 역사(力士) 앞에서는 결국 물러나야 할 터다. 그래야만 진정한 봄이 올 것이다. 예보를 보니 다음 주 중반은 되어야 온전한 봄이 시작될 듯하다.


Yunchan Lim - Chopin Études Op.10 No.3, 5, 1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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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Chopin)이 1829년에서 1832년 사이, 20대 초반에 완성한 **<12개의 연습곡(Études), Op.10>**은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입니다. 이전까지 '연습곡(Etude)'이란 손가락의 기교를 연마하기 위한 무미건조한 기술 교본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쇼팽은 여기에 고도의 예술성과 시적인 서사를 부여했습니다. 이는 훗날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에게 헌정되었고, 리스트는 이 곡들을 보고 "인간의 손으로 연주 가능한가"라며 경탄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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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4일, 런던의 위그모어 홀에서 열린 이 프라이빗 콘서트는 홀의 발전을 위한 '디렉터 기금(Director’s Fund)' 출범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500석 남짓한 이 아담한 공간은 연주자의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친밀한 공기를 자랑합니다.


임윤찬은 이곳에서 화려한 쇼맨십 대신, 작곡가의 고독과 대화하듯 내밀한 연주를 선보였습니다.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쇼팽의 영혼이 깃든 신성한 의식 같았다"라고 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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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들에게 '에튀드(Étude)'란 본래 성악가의 목소리 다듬기, 무용수의 고된 발놀림, 혹은 운동선수의 예비 몸풀기처럼 *'본격적인 연주에 들어가기에 앞서 손 풀기용 곡'이었습니다. 손가락의 독립성과 속도를 위해 골방에서 반복하던 이 지루한 훈련 교본이 쇼팽(Chopin)이라는 천재를 만나 어떻게 런던 위그모어 홀을 홀린 '건반 위의 시(詩)'가 되었을까요?


19세기 초반까지 에튀드(Étude, 프랑스어로 '공부' 혹은 '연습'이라는 뜻)는 오직 기술적인 연마를 위한 곡이었습니다.

손가락 독립성: 약한 넷째, 다섯째 손가락의 힘을 기르기 위해.

속도와 정확성: 아주 빠른 패시지를 실수 없이 연주하기 위해.

유연성: 손을 넓게 벌리거나 도약하는 훈련을 위해.

당시의 위상: 그래서 에튀드는 무대 위에서 청중에게 들려주는 '연주곡'이라기보다, 골방에서 혼자 반복하며 근육을 단련하는 '지루한 훈련 교본'에 가까웠습니다.


쇼팽(Chopin)은 이 지루한 훈련용 곡에 '시적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임윤찬의 연주를 감상용으로 듣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술을 넘어선 예술: 쇼팽의 에튀드는 분명 '손 풀기'에 필요한 극악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기교들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화나 슬픈 서사시를 만들어냅니다.

무대 위의 주인공: 쇼팽 덕분에 에튀드는 연습실을 벗어나 화려한 연주홀의 메인 프로그램으로 등극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운동선수의 '투혼'이 필요하지만, 결과물은 시인의 '고백'이 된 것이죠.


오늘 감상하실 네 곡의 Étude는 마치 인생의 사계절을 짧은 필름에 담아낸 듯합니다. 임윤찬(Yunchan Lim)의 손끝에서 훈련의 흔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귀한 예술의 서사가 채워지는 과정을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https://youtu.be/7k2cuQa5GEk?si=AYup-CWWRam6i_B3


① No. 3E장조 '이별의 곡(Triste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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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이 "내 생애 다시는 이토록 아름다운 선율을 쓰지 못할 것"이라 아꼈던 곡입니다. 비 내리는 아침, 제월당 마루에서 산수유를 바라보던 그 고요한 힐링의 시간과 닮았습니다. 단순해 보이는 멜로디 아래로 16분 음표의 내성 화음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애틋함을 자아냅니다.


임윤찬의 타건은 마치 잎사귀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섬세합니다. 중간부(Con fuoco)에서 몰아치는 반음계적 진행과 불협화음의 충돌을 다룰 때도 그는 감정을 마구 쏟아내기보다 절제된 페달링으로 음의 경계를 명확히 합니다. 특히 격정 끝에 다시 처음의 고요함으로 돌아올 때, 그가 만들어내는 침묵의 여운은 관객의 숨소리마저 멎게 할 만큼 압도적입니다.


② No. 5 G♭장조 '흑건(Black Ke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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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는 급반전되어 건반 위를 가볍게 산책하는 요정의 발걸음으로 변합니다. 오른손이 오로지 검은건반(5음 음계)만을 사용하여 연주하는 곡으로, 화사한 색채감이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햇살처럼 눈부십니다.


임윤찬의 연주에 대해 '건반 위를 굴러가는 진주 같다'는 평론가들의 극찬이 여기서 증명됩니다. 임윤찬은 이를 단순한 기교 과시용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음에 서로 다른 강약을 입혀 선율에 표정을 부여하고, 우아하면서도 위트 있게 찰나의 기쁨을 그려냅니다.


③ No. 11 E♭장조 '아르페지오(Arpegg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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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를 켜는 듯한 넓은 음폭의 펼침화음(Arpeggio)이 이어집니다. 숲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신비로운 속삭임 같기도, 꿈속에서 나누는 연인과의 대화 같기도 한 몽환적인 구간입니다. 겹겹의 화음 층 사이로 고독한 멜로디가 유령처럼 떠다닙니다.


임윤찬의 장점인 '입체적인 타건'이 빛을 발합니다. 여러 층의 소리를 마치 숲 속의 안개처럼 겹쳐내어(Layering) 풍성한 공간감을 만들어냅니다. 그의 손끝에서 나오는 소리는 피아노라는 타악기를 넘어 천상의 현악기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④ No. 12C단조 '혁명(Revolu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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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폭풍이 몰아칩니다. 조국 폴란드의 함락 소식을 듣고 분노한 쇼팽의 심장이 요동치는 곡입니다. 거친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듯한 왼손의 격정적인 하행 선율은 듣는 이의 심박수마저 높여놓습니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다루면서도 결코 이성을 잃지 않는다"는 분석이 정확합니다. 왼손의 거친 파도 속에서도 오른손의 비장한 주제 선율을 선명하게 부각합니다. 이는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조국을 향한 숭고한 정신과 굴복하지 않는 기개를 건반 위에 단단하게 새기는 작업과 같습니다.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랄프 왈도 에머슨은 그의 저서 <우정>에서 "친구란 그 앞에서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는 사람(A friend is a person with whom I may be sincere)"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끼리는 굳이 아픈 곳을 건드리지 않아도, 서로의 지지하는 진영이 달라도, 그저 함께 밥을 먹고 각자의 음료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됩니다. 특히, 친구를 만날 때는 에머슨의 정의처럼 숨김과 거짓이 없는 온전히 나인 상태이기에 기쁘고 위로가 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천안에서 돌아오는 길, 졸음쉼터의 짧은 잠 뒤에 밀려왔던 그 안도감은 아마도 쇼팽의 에튀드가 주는 위로와 닮아 있었을 것입니다. 쇼팽 또한 조국을 떠나는 슬픔을 견디며 이 곡들을 썼고, 그 치열한 '연습' 끝에 불후의 예술을 피워냈습니다.


친구와의 만남이 바쁜 일상과 스트레스에서 숨 쉴 수 있는 구멍이 되어주듯, 우리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픔을 씻어내 줄 음악이 필요합니다. 동(冬) 장군의 고집도 시간이라는 역사(力士) 앞에서는 결국 무너질 것입니다. 쌀쌀함도 곧 따뜻한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겠지요.


비록 오늘 아침은 쌀쌀하지만 마음이 편안한 이유는, 말없이 위로가 되어주는 친구가 있고, 위안이 되는 음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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