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Mary Shelley)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2025년에도 『프랑켄슈타인』은 영화로 다시 상영되었습니다. 200여 년 전에 쓰인 소설이 오늘까지도 영화와 연극, 드라마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 작품이 단순한 공포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문명에 관한 오래된 질문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작품을 영화로도 접했고 소설로도 읽었습니다. 형식은 달랐지만, 마음속에 오래 남는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나를 왜 만들었나요?”
이 말은 소설 속 피조물이 창조자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향해 던지는 절규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질문은 낯설지 않습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삶이 절망으로 기울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하늘을 원망하듯 묻곤 합니다.
“나를 왜 태어나게 했나요?”
가끔은 자식들이 사춘기를 지나며 부모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말을 들으면 가슴이 내려앉습니다. 미안함이 먼저 올라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우리 또한 젊은 날 한 번쯤은 부모를 떠올리며 같은 말을 마음속으로 삼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던진 이 질문은 낯선 괴물의 절규가 아니라, 인간이 삶의 어두운 골목에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오래된 질문처럼 들립니다.
“나를 존재하게 한 이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우리 두 사람의 기억도 금세 사라지겠지요.
태양도 별도 보지 못하고 뺨을 간질이는 바람도 느끼지 못하게 되겠지요.
빛, 감정 그리고 감각이 사라질 것입니다.
… 하지만 이제 죽음은 내게 남은 유일한 위로입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현대지성, 오수원 역) 291쪽>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이 문장은 작품의 끝자락에 놓여 있습니다. 자신을 창조한 빅터 프랑켄슈타인(Victor Frankenstein)의 죽음을 마주한 뒤, 그가 만든 존재가 북극 탐험대장 로버트 월턴(Robert Walton) 앞에서 남기는 고백입니다.
이 문장은 소설 전체를 뒤늦게 환하게 비춥니다. 이 작품이 단지 흉측한 외모를 한 괴물의 폭주를 그린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거부당한 한 존재가 얼마나 오래 외로움과 모욕과 갈망 속에서 버텨왔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것을 요.
우리는 흔히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릴 때 번개가 치는 실험실, 전기로 살아나는 인조인간, 창조자를 위협하는 괴물의 이미지를 먼저 기억합니다. 그러나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가장 오래 남는 것은 그 이미지가 아닙니다. 끝내 이해받지 못한 채 사라져야 하는 존재의 목소리, 자신을 만든 이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한 생명의 비애, 그리고 창조란 무엇이고 책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깊고도 차가운 질문이 남습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낡지 않습니다. 과학기술의 이름으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지능,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게 된 시대일수록 이 소설은 오히려 더 또렷하게 다가옵니다.
소설은 제네바나 대학 실험실이 아니라 북극의 얼음 바다에서 시작됩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탐험대장 월턴은 누이 마거릿 새빌(Margaret Saville)에게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야심과 고독을 털어놓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멀리 가고 싶어 하는 인물입니다. 남들이 닿지 못한 곳까지 가서 자신만의 이름을 남기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 야심은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합니다. 그래서 월턴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소설 속에서 또 하나의 거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멀리 가고 싶어 하는 인간, 자신의 의지와 지적 열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인간, 그 끝이 어디인지 아직 모르는 인간 말입니다.
그가 북극에서 구조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이미 죽음 직전의 모습입니다. 쇠약해져 있고, 몸은 거의 망가져 있으며, 눈빛만이 마지막 집념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그는 누군가를 쫓아 여기까지 왔다고 말합니다. 그 누군가는 단순한 적이 아닙니다. 빅터의 말속에는 증오와 책임감, 공포와 집착이 얽혀 있습니다. 월턴은 그를 간호하며 점점 강한 호기심을 품게 되고, 두 사람은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어느 날 빅터는 자신과 비슷한 열망을 지닌 월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독자는 빅터의 입을 통해 본격적으로 비극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스위스 제네바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청년입니다. 총명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일찍부터 자연의 비밀에 매혹됩니다. 어린 시절 그가 탐독한 것은 연금술사와 자연철학자들의 저술이었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세계의 표면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원리와 힘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왜 생명은 태어나는가, 왜 죽음은 오는가, 생명의 불꽃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이러한 질문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거의 종교적 열정처럼 그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잉골슈타트 대학교에 들어가 근대 과학을 접한 뒤에도 그는 그 열정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정교하고 더 위험한 방향으로 밀고 갑니다. 생명의 원리를 알게 된다면, 인간이 병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유혹, 창조의 영역까지 손을 뻗을 수 있으리라는 오만이 그를 점점 지배합니다. 그는 무덤과 해부실, 부패한 신체와 죽음의 흔적이 가득한 곳을 드나들며 생명의 재료를 모읍니다. 이 장면에서 메리 셸리는 빅터를 단순한 미치광이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치열하고, 너무도 일관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로 그립니다. 그래서 그의 비극은 더 무섭습니다. 악의 때문이 아니라, 열정과 지성의 과잉 때문에 비극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어느 11월의 음산한 밤, 빅터는 자신이 조합한 육체에 생명의 불꽃을 불어넣는 데 성공합니다. 죽은 물질이 꿈틀이고, 눈이 열리고, 존재가 깨어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빅터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성공 앞에서 도망칩니다. 왜냐하면 그가 마주한 것은 완성의 기쁨이 아니라, 자신이 저질러 놓은 창조의 공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난 존재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 생명이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단 한 번도 묻지 않습니다. 그는 창조자가 되었지만, 단 한순간도 보호자나 책임자가 되지 못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읽을 때 가장 아프게 다가오는 지점입니다. 괴물은 처음부터 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태어나는 순간 버려졌습니다. 세상에 나온 첫날, 처음 마주한 인간, 곧 자신의 창조자가 비명과 혐오 속에서 도망쳤습니다. 한 생명체에게 첫 번째 세계는 곧 첫 번째 얼굴입니다. 그런데 그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면, 그 존재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괴물은 혼자 세상을 배웁니다. 추위를 느끼고, 배고픔을 알고, 불의 뜨거움과 유익함을 동시에 배웁니다. 어둠과 빛, 물과 숲, 인간의 목소리와 집의 온기를 멀리서 관찰합니다. 이 대목의 서술은 놀랄 만큼 섬세합니다. 메리 셸리는 괴물을 단순히 힘센 살인자로 등장시키지 않고, 갓 태어난 아이처럼 감각으로 세계를 익혀가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그는 숨어서 인간의 말을 배우고, 글을 이해하게 되며, 인간 사회의 질서와 감정을 서서히 습득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비극을 더 또렷하게 자각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장면은 드 레이시(De Lacey) 가족을 바라보는 부분입니다. 괴물은 숲 속 작은 오두막 가까이에 몸을 숨긴 채 이 가족을 오랫동안 지켜봅니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아끼고, 말과 표정으로 정을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그는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언어를 배우고, 책을 통해 역사와 감정과 도덕을 익히며, 자신도 그들처럼 사랑받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괴물은 더 이상 괴물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보다 더 절실하게 인간 세계를 갈망하는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그 갈망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시각장애가 있는 노인 드 레이시에게는 잠시 다가갈 수 있었지만, 다른 가족들이 돌아오자 그는 즉시 폭력과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그 순간 괴물은 단순히 거절당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에게 선언한 것입니다. 너는 아무리 말하고, 배우고, 사랑을 원해도, 너의 얼굴이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이 장면 이후 괴물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선의와 배움만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 외모가 존재 전체를 결정해 버리는 잔인한 질서를 그는 몸으로 배웁니다.
이 소설이 지금도 강하게 남는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을 독자 앞에 놓기 때문입니다. 괴물은 처음부터 괴물이었을까요.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과 거부, 창조자의 무책임 속에서 점차 괴물이 되어 간 것일까요. 메리 셸리는 답을 강요하지 않지만, 서사의 흐름은 분명히 말합니다. 괴물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괴되었습니다. 그는 태생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배울 기회를 박탈당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끝에 복수와 증오를 택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괴물의 살인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메리 셸리는 더 어려운 자리에 우리를 세웁니다. 이해할 수는 있지만 용납할 수는 없는 폭력, 연민할 수는 있지만 지울 수는 없는 죄, 그 모순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복잡함을 보게 합니다. 괴물은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고,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세계를 향해 고통스럽게 질문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양가성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은 단선적인 교훈담이 아니라 깊은 비극으로 남습니다.
괴물은 결국 창조자인 빅터를 찾아가 말합니다. 자신과 같은 존재 하나만 더 만들어 달라고. 세상 어디에도 섞일 수 없는 자신에게, 최소한 함께 추방당할 동반자 하나는 허락해 달라고. 이것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존재의 최소 조건을 요청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혼자서는 견딜 수 없으니, 적어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을 존재 하나를 달라는 절박한 청원입니다.
그리고 빅터는 이 요청을 받아들이는 듯하다가, 마지막 순간 다시 파괴합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새로운 생명이 낳을 예측 불가능한 미래였습니다. 더 많은 괴물들, 통제 불가능한 종족, 인간 사회에 대한 위협. 그의 공포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이번에도 창조와 파괴의 권한만 행사할 뿐 관계의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만들기로 약속했다가 찢어 버리고, 설명도, 위로도, 다른 길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괴물은 완전히 절망합니다. 그리고 복수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괴물이 빅터에게 남긴 말, “나는 너의 결혼식 밤에 나타나겠다”는 선언은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불길한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빅터는 그 말을 듣고도 끝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괴물이 자신을 직접 죽이러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혼식 당일 밤,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듯 긴장합니다. 그러나 괴물이 겨눈 것은 빅터 자신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겨눈 것은 빅터가 사랑하고 의지하던 삶 전체였습니다.
이미 그전에 빅터는 어린 동생 윌리엄을 잃었고, 무고한 유스틴 저스틴(Justine Moritz)이 누명을 쓴 채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친구 앙리 클레르발(Henry Clerval)도 희생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식 밤, 아내 엘리자베스(Elizabeth Lavenza)까지 잃습니다. 그 뒤에는 아버지 알퐁스(Alphonse Frankenstein)의 죽음이 이어집니다.
한 사람의 오만한 창조 행위가 한 가족과 주변의 삶을 얼마나 깊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메리 셸리는 매우 냉혹하게 보여줍니다. 빅터는 자신이 만든 존재를 끝까지 “문제”로만 여겼지, 그 존재와의 관계를 책임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거의 모든 사람을 잃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공포보다 오히려 뒤늦은 자각의 참담함에 가깝습니다. 빅터는 자신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면서도, 그 잘못을 제대로 바로잡을 용기나 지혜를 끝내 갖지 못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듯 괴물을 추적하지만, 그 추적은 정의의 실현이라기보다 이미 무너진 삶의 폐허를 질질 끌고 다니는 행위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그는 인간 세상의 끝인 북극까지 가게 됩니다. 얼음과 고독, 끝없이 미끄러지는 추적의 공간인 북극은 빅터와 괴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라고 생각됩니다. 둘은 서로를 없애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통해서만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게 된 존재들입니다.
마침내 빅터는 월턴의 배 안에서 죽습니다. 자신이 쫓던 존재를 끝내 파괴하지 못한 채, 자신이 만든 비극을 바로잡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합니다. 이제 괴물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집니다. 승리의 환호를 지를지, 냉담하게 떠날지, 아니면 또 다른 복수를 꿈꿀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메리 셸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면은 전혀 다릅니다. 괴물은 빅터의 시신 앞에서 깊이 비통해합니다. 울부짖고, 후회하고,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끌어안은 채 무너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 소개한 '책 속의 한 문장'이 나옵니다. “죽음은 내게 남은 유일한 위로입니다.” 그것은 자기혐오와 회한, 관계의 파국과 존재의 소멸을 한꺼번에 안고 있는 말입니다. 그는 빅터를 미워했습니다. 동시에 그를 갈망했습니다. 그는 빅터에게 복수했습니다. 동시에 빅터가 유일하게 자신과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 역시 세상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에게 창조자인 빅터는 미움과 사랑, 원망과 의존이 뒤엉킨 유일한 관계였습니다. 그러니 빅터의 죽음은 복수의 완성이 아니라 관계의 최종 붕괴를 뜻합니다.
괴물의 이 독백은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을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바꾸어 놓은 것 같습니다. 더 이상 그를 단순한 살인 괴물로만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증오하면서도 사랑받고 싶었던 존재, 복수하면서도 이해받고 싶었던 존재,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어디에서부터 무너졌는지 알고 있었던 존재입니다. 이 자기 인식이야말로 괴물을 더 비극적으로 만듭니다. 진짜 절망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너무 잘 알면서도 되돌릴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이 1818년에 출간되었을 때, 이 작품은 낭만주의 시대의 불안과 산업혁명기의 과학적 상상력을 동시에 품고 있었습니다. 1816년, 이른바 ‘여름이 사라진 해’에 제네바 호수 근처 디오다티 별장에서 시작된 이 소설은 우연한 놀이처럼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근대 문명이 가진 가장 무서운 질문 가운데 하나를 문학 안에 심어 놓았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만든 뒤에는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메리 셸리는 당시 널리 논의되던 생체전기 실험과 생명의 원리에 대한 과학적 관심을 작품의 토대로 삼았습니다. 갈바니(Luigi Galvani)의 실험과 에라스뮈스 다윈(Erasmus Darwin) 등 당대 자연철학의 분위기는 이 작품의 배경에 분명히 스며 있습니다. 그러나 메리 셸리가 남긴 것은 단순한 과학소설의 원형만이 아닙니다. 그녀는 과학적 호기심의 서늘한 매혹과 윤리적 책임의 공백을 한 이야기 안에 함께 묶어 냈습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흔히 최초의 SF로 불리지만, 동시에 가장 오래된 윤리소설이기도 합니다.
빅터는 생명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생명과 함께 살아갈 준비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창조의 순간에는 주체였으나, 돌봄의 순간에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이 소설의 진짜 비판은 과학 그 자체를 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위가 낳을 관계와 의무를 외면하는 인간의 태도를 향합니다. 그러니 이 작품이 오늘날 인공지능, 유전공학, 복제기술, 자동화된 무기체계 같은 논의에서 반복해서 소환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새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인류는 묻습니다. 이것을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것을 만든 뒤 우리는 무엇을 감당할 것인가를 말입니다.
괴물의 독백을 중심에 놓고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 『프랑켄슈타인』은 과학 발전의 명암만을 다룬 소설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배제와 차별, 낙인과 혐오를 정면으로 비추는 작품이 됩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없습니다. 가족도, 계급도, 시민권도, 역사도 없습니다. 오직 외양만으로 판단받고, 아무리 말을 해도 말이 들리지 않으며, 아무리 선의를 품어도 두려움의 대상으로 고정됩니다. 그는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얼굴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공동체 바깥에 놓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소설을 사회적으로 읽습니다. 어떤 존재가 괴물이 되는 것은 본성 때문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시선과 제도, 폭력의 결과일 수 있다고. 또 어떤 이들은 여성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을 읽습니다. 남성 과학자가 여성의 몸과 출산의 영역을 우회해 독자적으로 생명을 만들려 할 때, 그 과정은 오히려 더 끔찍한 파국을 낳는다는 해석입니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빅터와 괴물을 하나의 분열된 자아처럼 읽기도 합니다. 빅터가 부정하고 싶었던 욕망과 공포, 책임 회피와 자기 파괴 충동이 괴물의 형상으로 밖에 나타난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해석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 남는 것은 결국 누구든 태어나자마자 환영받지 못하고, 말을 배우기 전에 혐오를 배우고, 사랑을 기대하기 전에 자기 존재가 거부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 삶은 파괴될 수 있다는 진실 말입니다. 이때 『프랑켄슈타인』은 비범한 상상력의 고전이면서 동시에 극도로 현실적인 소설이 됩니다.
이 문장이 오래 남는 이유는 그것이 죽음을 찬미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끝내 살아낼 수 없었던 한 존재의 고독이 너무 깊고 선명하게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태양과 별, 바람과 감각을 말합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삶을 사랑했던 존재의 말입니다. 세계의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알았던 존재, 잎사귀 소리와 새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였던 존재, 단지 살아 있다는 감각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존재의 말입니다. 그런 존재가 마지막에 이르러 죽음만을 위로라고 말하게 되었다면, 그 비극은 단지 개인의 몰락이 아니라 사회와 창조자의 실패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한동안 제목이 흔들립니다. 정말 이 작품의 제목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맞는가. 아니면 이름조차 갖지 못한 그 피조물이야말로 이 소설의 진짜 중심인가. 메리 셸리는 제목을 바꾸지 않았지만, 마지막 장면을 읽은 독자는 자연스럽게 괴물 쪽으로 시선을 옮기게 됩니다. 빅터가 만든 것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인간의 외면 속에서 괴물이 되어 간 하나의 영혼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을 읽는 일은 단순히 고전문학 한 권을 읽는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드는 기술과 제도, 담론과 관계가 과연 누구를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또한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두려움으로만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놓고도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메리 셸리는 19세에 이 작품의 씨앗을 떠올렸고, 20세 무렵 이 놀라운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설은 200년이 넘도록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보다 더 먼저, 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를 물으라고. 『프랑켄슈타인』이 고전이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달라져도, 인간의 책임과 고독, 창조와 버림의 문제는 조금도 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괴물은 북극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을 불태워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없애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학과 영화, 과학과 윤리의 논쟁 속에서 계속 살아남아 있게 됩니다. 빅터가 만든 피조물은 이야기 밖으로 나와 현대 문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통제되지 않는 기술의 상징이기도 하고, 버려진 존재의 상징이기도 하며, 사랑받지 못한 생명의 절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 속의 한 문장은 단순히 괴물의 마지막 말은 인간이 자신이 만든 세계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을 때 얼마나 깊은 파국이 생기는지 보여주는 오래된 경고이자, 동시에 이해받고 싶었던 한 존재의 가장 늦은 고백입니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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