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비워지는 마음

[아침음악] Beethoven-Emperor 1.Allegro

by 메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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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 않는 산 밑의 우물 /

산중 친구들에게 공양하오니 /

표주박 하나씩 가지고 와서 /

저마다 둥근달 건져 가시오"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낸 강원도 화전민 오두막, '수류산방(水流山房)'이라 이름 붙인 그 소박한 거처에서 법정 스님이 남기신 글 중 하나입니다. 우물가에 비친 달은 퍼내어도 줄지 않고, 소유하려 해도 가둘 수 없는 존재지요. 누구나 찾아와 그저 마음의 표주박에 담아 가기만 하면 그뿐이라는 이 넉넉한 초대는, 평생을 '비움'으로 정진하셨던 스님의 삶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오늘, 3월 11일은 스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 열반에 드신 지 어느덧 16년이 되는 날입니다.


아마 스님은 당신의 소망대로 이야기 속 '어린 왕자'가 사는 어느 별에 잠시 들렀다가 하늘로 가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10년 스님의 입적 이후, 그 가르침을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해 엮인 산문집 『스스로 행복하라』를 보면 스님이 생전에 어린 왕자에게 썼던 편지가 나옵니다.


"어린 왕자! 너는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더구나. 이 육신을 묵은 허물로 비유하면서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더구나. 삶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은 한 조각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더라."


우주의 근원을 넘나드는 이에게 죽음은 그저 삶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스님의 통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알았던 어린 왕자의 마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입국 사증 같은 번잡한 절차 없는 그 별에서 스님은 지금쯤 장미와 안부를 나누고 계실까요.


3년째 난초 화분 둘을 애지중지 길렀다는 스님은, 장마 후 쏟아지는 햇볕 아래 화분을 놓고 왔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간 일화를 말씀하시며 자신의 집착을 뉘우치셨죠. 그렇게 '무소유'를 터득하고 설파하셨던 고승의 뒷모습을 생각하는 아침입니다.


가끔씩 마음이 번잡할 때마다 스님의 책을 찾아 읽습니다. 그러다 보면 엉킨 마음이 조금은 편해집니다. 요즘은 더욱 그렇습니다. 스님께서는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여행을 통해 비본질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주기적으로 털어 내야 한다고 강조하셨지요.


저의 일상도 매일 비슷합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무언가를 채우려 애쓰지만, 정작 나를 비워내는 일에는 서툴렀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시간을 채울 내 삶을 만들 사람은 결국 나 스스로 한층 한층 쌓아야 하기에, 지금이야말로 스님이 말씀하신 그 '여행'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긴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짐을 조금 들고 가야 한다. 아주 높이 올라가려면 가볍게 여행해야 한다."


여름이 오기 전, 소유하려는 마음을 비우고 가벼운 봇짐 하나 메고 떠나려 합니다. 그 여정의 첫걸음에 힘을 실어줄 웅장하고도 고결한 선율을 오늘 아침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in E-Flat Major, Op. 73 "Emperor": I. Alleg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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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이 쓰인 1809년, 빈은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점령당해 있었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빈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고, 귀족들은 도시를 떠났죠. 베토벤 자신도 청력 상실이라는 개인적인 고통과, 폭격의 소음 때문에 지하실에 숨어 베개로 귀를 감싸며 작업해야 했습니다. 이 곡은 바로 그 참담하고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오히려 인류의 희망과 승리를 노래하겠다는 베토벤의 강력한 의지를 담아 탄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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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은 베토벤이 작곡한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입니다. 흔히 '황제'라는 별칭 때문에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곡이라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나폴레옹에 대한 환멸을 느낀 베토벤이 오히려 그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인간 정신의 황제'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황제'라는 이름은 작곡가 본인이 아닌, 당시 영국의 피아노 제작자였던 크라머가 이 곡의 압도적인 위엄을 보고 붙인 별명입니다. 초연 당시 베토벤은 이미 청력이 크게 약화되어 직접 연주할 수 없었고, 그의 제자 체르니가 초연을 맡아 위대한 서막을 알렸습니다.

https://youtu.be/vfv0nVdUrqE?si=lAfNDmAeLs9G3Wrb

1악장의 전개 - 거대한 폭풍과 찬란한 태양 : 1악장은 기존의 관습을 완전히 깨부숩니다.

압도적인 오프닝: 보통 오케스트라가 서주를 연주한 뒤 피아노가 등장하던 전통과 달리, 첫마디부터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E♭장조 코드가 울려 퍼지고, 곧바로 피아노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화려한 카덴차(독주)를 선보입니다. 이는 마치 "내가 바로 이 곡의 주인이다"라고 선포하는 듯한 자신감이죠.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대화: 오케스트라는 군대처럼 웅장하고 위엄 있는 테마를 제시하고, 피아노는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천둥처럼 그 사이를 가로지릅니다. 두 존재가 서로 밀고 당기며 만드는 긴장감은 마치 거대한 바다 위를 항해하는 거함과 그 주위를 감싸는 파도의 역동적인 교감을 연상시킵니다.

상상으로 그리는 풍경: 이 곡을 들으실 때 창밖을 내다보며 이런 상상을 해보세요. 짙은 먹구름이 걷히고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찬란하게 솟아오르는 장면 말입니다. 베토벤이 고난을 뚫고 쟁취해 낸 승리의 환희가 곡 곳곳에 박혀 있습니다. 멜로디는 강철처럼 단단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새벽이슬처럼 투명하게 반짝입니다.


모든 것을 덜 어내며, 가볍게 하루를 시작

아침 공기가 아직 차갑습니다.

겨울이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계절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습니다.


법정스님의 글을 읽다 보면

삶이 아주 복잡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버려야 할 것을 조금 내려놓고

가벼워지는 일.

어쩌면 그것이 여행의 시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조금 가볍게 정리해 보려 합니다.


언젠가 떠날 여행을 위해

짐을 조금 줄여보는 아침입니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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