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 마망아 할머니 기도 들었어? 마망 : 응 들었어.... 오빠도 들었어? 남편 : 으응. 들었어. 무서웠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꺾어버려야 한다고 하셨나? 마망 : 응. 맞아. 아 쫌 왜그러시는지 몰라. 오빠 너무 신경 쓰지 마.
추석 연휴를 맞아 친정에 남편과 함께 내려갔다. 추석 당일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조촐하게 식탁에 둘러앉았다. 저녁 식사를 앞두고 할머니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교회에 다니지는 않지만, 할머니, 아빠, 엄마, 내가 눈을 감고 나자 얼결에 따라 감았던 모양이다.
"먼 길을 별 탈 없이 오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본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부러뜨려 없애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디 소중한 열매를 맺게 하시...." 나는 살짝 감고 있던 눈을 더 질끈 감았다. 부디 남편이 못알아들었으면 했다.
할머니는 다양한 종류의 잔소리를 가지고 있다. 내가 뭔가 헛수고를 하고 있을 때면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한다"든지 이런 식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물건을 제대로 치우지 않거나 자주 덤벙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옛날 같으믄 애기 엄씨여야. (옛날 같으면 애기 엄마가 될 나이다)" 고로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고 단정하게 뭐든 마무리하는 버릇을 들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한참 어린 나이에, 그러니까 내 주변 누구도 나에게 결혼하라고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어렸을 때는 맞받아치는 게 쉬웠다. "할머니. 그건 할머니 때 이야기지." 하고 등짝을 맞기 전에 도망가면 되었으니까.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며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했다. 심지어 할머니도 이름을 아는 친구들까지 결혼하고 아기를 낳기 시작했다. 내 나이가 진짜 애기 엄마가 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냥 할머니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는 척할 뿐이었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때 즈음부터 누군가의 결혼식을 가려고 준비를 하다가도 "어디 가냐?" 하면 "그냥. 친구 만나러." 하고 얼버무렸다.
그렇게 20대 후반이 되고 30대 초반이 되면서 잔소리는 횟수와 강도가 단번에 배로 뛰었다. 30살 무렵부터는 본가에서 떨어져나와 살게 되었다. 원래 가족이란 떨어져 지내게 되면 애틋한 법이다. 잔소리 대마왕의 소굴에서 독립하였지만, 본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주 본가를 제 발로 찾았다. 그 애틋함도 몇 개월 가지 못해 지쳐 나가떨어졌다. "누구 만나고는 있느냐, 언제 결혼해서 언제 애기를 낳을래. 지금 낳아도 노산이다. 에휴" 하는 매번 반복되는 레퍼토리 때문에 나는 점점 본가로 향하는 발길을 줄였다.
그 무렵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결혼하고 싶다고. 진짜 하고 싶어. 근데 소개팅을 해도 좋은 사람인지 잘 모르겠고, 깊게 고민 안 하고 만났다가는 시간만 죽일 것 같고. 고민하다가는 기회가 그냥 지나가 버릴 것 같고. 무엇보다 괜찮은 사람들은 다 벌써 장가를 가버린 것 같다는 말이야. 그런데도 자꾸 집에서 재촉하니까 내 속이 너무 상해. 자존심 상해서 나도 시집가고 싶은데 잘 안돼! 할 수도 없고 ㅋㅋㅋ" 결혼에 관심이 없다면 모르겠으나, 나도 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 자꾸 하라고 하니 괜히 더 심통이 났다.
그렇게 영겁의 시간 같았던 30대 초반을 보내고 나는 30대 중반이 되었다. 그사이 정말 감사하게도 남편을 만나 나는 결혼을 했다. 이제 잔소리, 할머니가 해주는 내 걱정에서 자유로워질 차례였다. (물론 엄마가 해주는 내 걱정에서도 으흐흐)
1년 전,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다음 날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엄마~ 우리 잘 도착했어요. 할머니랑 아빠는 주무세요?" "아니. 안 주무셔. 할머니 바꿔줄게." 핸드폰을 전해 받은 할머니는 인사를 대충 하시고 이렇게 말했다. "언능 좋은 소식 들려주라잉?" 뜻밖의 재촉에 나와 남편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민망해진 나는 "으응. 할머니 우리 어제 결혼했어.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 증손주 낳으면 할머니가 키워주게? 큭큭." 하고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는 친정과 시댁에 차례로 인사를 드리러 갔다. 신혼여행 후 2주간의 여유를 두고 내려간 길이라 결혼식을 마친 지 한 달째였다.
"할머니. 우리 잘 다녀왔어. 결혼식 사진 많이 봤어? 예쁘지?"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신 할머니에게 결혼식 사진과 친구가 만들어준 영상을 보여드렸다. 남편과 우리 집에서 하루를 꼬박 같이 보내니 이제 진짜 가족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친정에서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시댁으로 가려고 나섰다. 짐을 챙기는 나에게 할머니가 차비를 하라며 봉투에 용돈을 담아 주었다. 봉투를 손에 쥐어주며 할머니가 말했다. "할미 소원이다잉. 언능 애기. 알제?" 나는 "아니 할머니. 나 결혼한 지 한 달밖에 안됐어. 아조 징하네 징해." "으잉? 한 달밖에 안 됐어야? 나는 한 참된 줄 알았다잉. 그래도 니가 젊은 나이는 아니여야. 서둘러야제." "알아서 한다구" 하고 민망해하는 오빠의 손을 씩씩하게 잡아끌고 친정을 떠났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우리는 추석 명절을 맞아 친정에 내려간 거였다.
양력으로 챙기는 남편의 생일이 올해는 추석과 겹쳤다. 친정에서 생일을 보내게 된 남편은 처가에서 보내는 첫 생일에 어리둥절해 있었다. "장 서방 올해 서른아홉이라고?" 하고 할머니가 방에서 나와 물었다. "웅. 할머니. 오빠 오늘 삼십 대로 보내는 마지막 생일이야." 내가 대신 대답했다. 그 뒤로 한참을 방에 계시다가 나온 할머니가 오빠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할머니가 몇 글자를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용돈 봉투였다. 할머니는 "아무리 앉아서 쓸라 해도 잘 안써진다. 장 서방 생일 축하하네?"
"오빠. 아까 할머니가 봉투에 뭐라고 써주셨어? 나도 좀 보여줘." 우리가 드린 용돈을 다시 줘버리셨다며 오빠는 울상이었다.
할머니의 차비, 용돈 봉투에는 종종 "할미의 소원이다. 예쁜 배필을 어서 만나거라." 하는 등의 할머니 식 잔소리가 자주 적혀있었다. 이번에는 오빠에게 어떤 잔소리를 적어주셨는지 궁금했다.
"할미가 장 서방 삼십 년 생일을 축하네 우리 사위가 되어 고맙녜"
괜히 눈물이 핑 돌아서 천장을 쳐다봤다. 할머니가 잔소리를 많이 해도 좋으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우리 곁에 계시면 좋겠다고 아주 많이 생각했다. 늦둥이 남동생 태어날 때 "요놈 학교 가는 것은 보고 죽어야 하는디" 했던 할머니가 남동생 군대 다녀오고 취업 준비하는 지금까지 정정하신 것처럼. 할머니는 요즘 부쩍 우리가 집을 나설 때면 "언제 또 볼까냐" 하신다. 우리 할머니가 나중에 증손주들이 대학가고 결혼하는 것까지 보셨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