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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Oct 26. 2020

[연재를 마치며] 전사가 될 거야

(공대여자 말고 그냥 나) 나를 보호하기 위한 글쓰기


전사자세 2



3개월 전, 이제 막 휴직을 시작한 나에게 요가 동기 G가 이렇게 말했다. "언니. 3개월 후에는 전사가 되어서 돌아가는 거야. 언니 응원할게!" 그날부터 나의 목표는 '전사가 되어 회사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일상의 무료하고 안전한 반복이 지난 후 나는 나의 다짐을 잊었던가, 루틴이 일상이 되어 다짐에 대한 감흥이 없어졌던가.


지난 금요일도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루틴으로 아침을 열었다. 몸은 바쁜데 마음은 평온한 오전을 보내고 하던 대로 요가원에 갔다.


익숙한 워밍업을 하고 평소대로 수다를 떨고 원래대로 수업에 임했다. 어쩐 일로 잘 되는 자세, 잘 되다가 잘 안 되는 자세, 영영 안되는 자세들이 있었다. 수업 마치고 집에 가서 뭘 먹지 하는 생각이 중간중간 끼어들어 왔다.


그러던 중 전사자세 2를 마주하게 되었다. 양쪽 발바닥은 바닥에 붙여준다. 바닥에 붙어있는 발끝에서 골반으로 힘을 끌어당겨 준다. 양손은 양쪽에서 끌어당기듯 쭉 뻗어주고 쇄골을 넓혀주며 어깨에 힘을 뺀다. 골반으로 당겨온 힘을 다시 발바닥으로 보내 바닥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준다. 시선을 90도로 굽혀있는 다리 쪽의 손끝을 바라본다. 눈에 힘을 풀어준다.


"진짜 전사 같아." 선생님이 내 친구 S에게 말씀하셨다. 아마 모든 정렬을 올바르게 지키면서 손끝을 인자하게 바라보고 있었을 친구 S 말이다. S는 민망했는지 피식 웃었고 그 옆의 나는 너무도 이해되어 픽 웃어버렸다.


친구 S는 집에 돌아가 SNS 스토리에 이렇게 남겨놓는다. 사실 요즘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달리기 앱에 본인의 닉네임이 "전사가 될 거야" 였다고. 선생님이 나의 닉네임을 어떻게 아셨는지 소름이 돋았다고.


나는 친구의 글에 답을 보낸다. "나도 너 따라서 앱에 가입했다고. 나의 아이디는 '나도 전사가 될 거야'라고."


그렇게 나는 나의 첫 마음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처음 휴직을 시작하고 아침 산책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그 주, 엄청나게 강한 비바람이 불었다. 나무들은 뽑혀 나갈 것 같았고 나도 나무들과 함께 힘없이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먹었으니 해야 할 것 같았고 어떻게 얻은 나의 시간인데 허비하고 앉아있나 싶은 조급함도 있었다. 친구들은 "이 비바람을 뚫고 왜 나간 거야. 무리하지 마 제발. 괜찮아?" 안부를 전했다. 나는 날아가지 않았다고. 나무들도 괜찮다고 말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 새롭고 매 끼니가 너무 소중했던 처음 한 달이 그렇게 지나갔다. 점차 익숙한 일상이 반복되었고 무료하고 편안한 나날이 되었다.


진짜 전사 같은 친구 옆에서 수련을 하고 나니 지난 3개월 동안 내가 진짜 전사가 된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도 전사가 될 거야'라고 다시 다짐해보았다. 괜히 소리내서 몇번 읽어본다. '나도 전사가 될 거야.' '나도 전사가 될 거야.' '나도 전사가 될거야.'


진짜 전사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친구 옆에서 나는 발가락에 힘을 조금 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머리 서기를 한 후 다리를 앞뒤로 뻗어야 하는데 내가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서 계속 위로만 뻗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제가 발가락에 힘을 조금 더 빼야 할까요?" 수업 후 선생님께 물었다. "응. 약간만 더 힘을 빼보면 좋을 것 같아요." 내가 산책을 할 때도 발꼬락에 힘을 빡 쥐고 걷는 모습을 들킨 것 같았다. 주인만큼 발가락도 혹사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발가락에 많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은 집에 와서 괜히 발가락들을 쳐다봤다가 만져줬다가 또 쳐다봤다가 멍하니 한참을 앉아있었다.


처음 요가를 시작하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한 자세에서 힘을 줘야 하는 부분, 힘을 빼야 하는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허리가 집히지 않을 정도의 힘만 엉덩이에 주고, 어깨와 가슴에는 힘을 빼야 한다던가. 다리를 펴고 상체를 앞으로 구부려야 하는데 무릎이 과하게 펴지면(과신전) 부상을 입으니 약간 무릎을 구부려준다거나(마이크로 밴딩) 하는 자세들 말이다.


힘을 빼는 것과 주는 것의 중간 어디 즈음에 장단을 맞춰야 하는지. 내가 회사에 돌아가서도 힘을 빼는 것과 힘을 주는 것을 적정하게 안배하여 사용할 수 있을지. 나의 근육을 사용하여 마음을 보호하고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헤쳐나갈 수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지난 3개월 동안 나는 작년 연말로 돌아가 그 시간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회생활 9년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이왕 진짜 전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김에 하나씩 복기해보기로 한다.


연말의 어느 날, 나의 부서장은 점심을 먹고 자리에 앉아있는 나에게 다가온다. 점심 후 각자의 자리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사무실은 무척 조용했다. 그는 모두에게 들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공대여자. 요즘 왜 술 안마셔? 임신했어?"


부서장은 그 후 송년회에서 다시 한번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애 낳으러 가고 싶으면 편하게 말해. 여기 누구 없다고 안 돌아가는 거 아니니까." 옆에서 듣던 선배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공대여자가 우리 부서의 대명사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부서장이 비웃듯 말했다. "한 명이 두 명 일을 한다고? 얘가? 그건 아니지. 공대여자 없어도 우리 부서 잘 돌아가."


몇 주후, 팀장이 나를 불러 말한다. "네 직속 후임하고 공대여자의 업무 분장을 다시 하려고 해." 나는 내가 있던 팀의 자리를 후임에게 내주고 좌천되는 기분을 안고 집에 왔다. 집으로 차를 몰고 오는 내내 소리 내서 울었다.


몸은 더 망가졌고 회사에서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한숨을 크게 쉬어도 목젖 뒤로 숨이 넘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휴직을 결정하게 되었다.


첫 번째 회사에 이어 두 번째 회사에서도 힘들어하는 내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한번은 몰라도 두 번 이상 뭔가가 반복되면 그건 어쩌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지금 몸담은 두 번째 회사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자기검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적었다가 지우고 수정하고 삭제하다 보니 남는 내용이 없어서 적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내가 처음 전공을 선택했을 때,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가 돌이켜보기 시작했다. 그때는 지긋지긋해서 떠올리기도 싫었고 급하게 덮어놓았던 일들이 막상 열어보니 생각보다 예쁘고 귀여워서 매일같이 놀랐다.


하루하루 나의 지난 시간들을 적어보다 보니 어느새 내가 하는 일에 내가 가지고 있던 자긍심과 감사함도 함께 덤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한 권의 브런치 북을 묶게 되었고, 나는 내가 직접 만든 활자로 가득한 나만의 앨범을 갖게 되었다.


이야기 속의 나는 생각보다 용감했고 생각보다 엉뚱했고 생각보다 단단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보다 잘 해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일을 돌이켜볼 용기를 내고, 하나하나 다시 적어보니 앞으로 다가올 일들은 별 어려움 없이 예전과 같이 또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처음 마음에 대해 잊지 않는 것만큼 힘든 일이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처음 마음이 지금 마음보다 항상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처음 마음이건 아니건 지금의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지금의 나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나를 진짜 전사로 만들어주는 힘 아닐까.


홍승은 작가가 자신의 책에 인용했던 한 문우의 말이 생각난다.

새싹은 영화관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며 진상 손님을 만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버텼다고 고백했다. "내가 당신을 써버리겠어!" 당신을 쏴버리겠어가 아닌 써버리겠다는 말이 어딘지 통쾌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박수 치며 웃었다.(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25쪽)


나는 진짜 전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나를 보호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이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다 써버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다시 한번 적진으로 들어갈 용기를 내본다. 손은 잔뜩 달궈졌으니 이제 누구를 쓸지 고르는 일만 남았다. 그냥 딱 한 놈만 걸려봐라. - < 꼬마 전사의 도전장 >





* 그 동안 '공대여자 말고 그냥 나'를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또 다른 전쟁터에서 누군가를 써버릴 준비를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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