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마음담론

[굿라이프] 의미있는 삶을 산다는 것

소설 [세로토닌] 과 함께 생각하기

by ma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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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소설 [세로토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으로 쪼개지는 작고 하얀 타원형 알약이다."


미셸 우엘벡의 장편소설 [세로토닌]은 주인공 플로랑이 먹고 있는 우울증약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중년 남자 플로랑은 극도의 무기력함과 우울증세로 이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우울증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은 물론 지나온 인생에 대한 무의미함을 이렇게 내비치고 있다.


몇몇 여자들로부터 얻어낸 것은 플로랑이라는 축약된 이름이 전부였고, 그 밖에 사회에서 얻어낸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부분에서도 나는 거의 다른 모든 부분에서처럼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렸던 것이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다고 할까.
그렇다고 딱히 내 책임이랄 것은 없는 것이, 신이 나를 그저 그렇게 만들었을 뿐,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실상 유약한 비겁자일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마흔여섯 살이나 먹었지만 나는 결코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통제해본 적이 없었다. 말하자면 나는 내 존재의 2막을 내 첫인상에 비해 무기력과 고통 속에서 의기소침하게 보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소설 초반 내내 이어지는 그의 독백과 다름없는 의식의 묘사는 펼쳐진 활자의 양에 비해 몹시 숨 가쁘게 읽혀진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마침표가 적절히 찍혀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충분히 쉬어 갈만한 여유를 갖게 하지만 말이다. 소설의 초반, 그러니까 그가 현 애인 유주를 벗어나기 전까지 극도로 답답해하는 모습이 내내 독자인 나에게까지 전달될 정도였다. 제삼자인 나까지 그리 조바심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그의 무의미함을 매일 증명해주는 뻔뻔한 동거녀에게서부터 하루 빨리 벗어나길 기원했다.


어느 소설에나 그러하듯 나는 주인공과 낯을 가리는 데 힘을 빼느라 쉽지 않은 도입부를 보냈다. 이 책에 대하여는 유독 그것이 심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플로랑의 깊은 우울감과 빠른 호흡으로 내뱉어지는 내면의 시끄러운 생각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 많은 혼잣말이 두서없이 적혀있던 터라 유독 쉽게 정이 붙지 않았다.


거의 80여 페이지를 읽고 나서야 주인공 플로랑과 나만의 보이지 않는 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인공의 동거녀 유주에 대한 험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일본인 유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본인의 부모들에게 어쩌다 한 번 전화를 걸었는데, 그 중 딱 한 번 그 통화 직후 플로랑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 (분명, 플로랑이 아닌 다른 우둔한 남자였다면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녀는 부모와 통화하며 일본 귀국을 언급했고, 내가 잘못 들었을 수가 없었기에, 자연히 나는 그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나를 안심시키는 데 급급했다. 요컨대 귀국은 한참후의 얘기이니, 내가 신경쓸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 찰나의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일종의 거대한 하얀 빛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정신이 아득해지더니 다음 순간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와 간단한 의문이 떠올랐고, 그것으로 나의 핵심적 의혹이 이내 풀렸다. 그녀가 계획하고 있는 이상적 삶에는 이미 일본으로 귀국하는 것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십 년이나 어떠면 삼십 년 뒤, 구체적으로는 내가 죽은 직후의 일일 터였다. 그리하여 그녀의 미래의 삶에는 이미 내 죽음이 계획돼 있었고, 그녀는 그걸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유주의 속내를 알게 된 나는 항우울제를 먹고 있는 플로랑에게 몹시도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플로랑은 "이미 마흔여섯 살이나 먹었지만 나는 결코 자신의 의지로 삶을 통제해본 적이 없었다."라고 했던 직전과 달리 아주 상반된 선택을 하게 된다. 여행 가방을 드는 것도, 장거리 운전을 교대하는 것도 나 몰라라 하고 플로랑의 사후에 대한 여우 같은 꿈을 꾸고 있는 동거녀 몰래 자취를 감춰버리는 것을 선택한다. 두 달 치 월세를 미리 내놓고 그 후에 그녀에게 닥칠 강제 귀국 또는 강제 결혼을 상상하며 소심하지만 그로서는 최대한의 복수를 한다.


항우울제로 인해 성 기능을 점점 잃어가는 그는 자발적인 실종을 선택한 직후 다시 한번 자발적인 성 기능 이별 여행이라는 선택을 한다. 과거의 연인들을 한 명씩 찾아가 그녀들이 살아가는 지금의 모습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듣는다. 대부분이 과거와 비교해 몹시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고 그는 씁쓸하고 찝찝한 기분이 들어 도망치듯 그들과의 대화에서 빠져나온다. 그런 후 그는 대학 동창인 에메릭을 만나러 간다.


나로서는 에메릭을 만날 때쯤의 플로랑의 말이 아주 차분하게 읽혔는데, 두서없고 알아듣기 힘든 말을 내내 하던 플로랑이 이제서야 제대로 하고 싶은 말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플로랑의 엉망이 되어버린 지금이 있기 전에 어느 정도 정상적이고 재미난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라니. 그리고 무엇보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내내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던 플로랑에게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말이다. 에메릭을 만난 후 플로랑은 이렇게 말한다.


학창시절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시절이다. 미래가 활짝 열려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유일한 시절. 이후로 펼쳐지는 성인의 삶, 직업인의 삶은 느리고 점진적인 정체와 다름 없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젊은 날의 우정, 학창시절에 맺었던 유일하게 진실한 우정은 성인의 삶의 문턱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우리의 좌절된 꿈의 산증인들, 명명백백한 추락의 산증인들과 대면하지 않기 위해 젊은 날의 친구들과의 재회를 피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서로가 처해있는 상황이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몹시 잘 알고 있는 둘이겠지만, 그 둘은 어려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다만 사격을 알려준다거나 술을 권한다거나 먹을 것을 내미는 것만을 할 뿐이다.


에메릭과의 시간을 보내는 중간중간 플로랑은 카미유를 떠올린다. 나는 인간 대부분에 대해, 특히 여성들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플로랑이 에메릭과 카미유를 교차적으로 떠올린다는 것이 몹시도 반가웠다. 카미유와의 첫 만남, 에메릭과의 재회, 카미유에 대한 회상, 현실의 에메릭 순으로 그 둘을 순서대로 배치하는 플로랑 의식의 흐름 속에서 지나가 버려서 더 아쉬운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현실에서 그 어느 것에 대한 애정도 내비치지 않던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던 과거를 이렇게 솔직하게 보여주다니 말이다.


그녀의 시선에서 나를 향한 무게감과 깊이를 읽을 때마다 나는 번번이 말 그대로 호흡이 멎을 정도로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바깥 세계는 약자들에게 가혹하고 가차 없었으며, 약속을 지키는 법이 거의 없었다. 사랑만이 우리가 아마도,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반짝이는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는 카미유와의 사랑을 추억하는 플로랑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니 그가 에메릭과 카미유의 이야기를 동시다발적으로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플로랑은 완벽히 바깥 세계로부터 보호받던 학창 시절을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에메릭이라는 존재를 찾아감으로써 학창 시절의 자신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설 중반부를 지나 후반으로 가며 에메릭은 농부들의 이념을 위해 싸우게 되고 유의미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이나 그들이 보호해야 할 대상의 이익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믿는다면 오산이리라. 그들은 이념을 위해 싸웠다.


학창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던 친구의 죽음 이후 플로랑은 다시 다급한 말들을 내뱉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비극 속에서도, 우리를 비껴간 다른 비극이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로서는 잊지 못할 사랑 카미유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다. 물론 직접 대면하지 못한 채 멀리에서 그녀를 본다.


이제는 서른 다섯 살이 넘은 여자가 여전히 열아홉 살짜리 여자애 같은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니.


나는 내가 한 차례, 혹은 몇 차례의 갑작스러운 노화를 맞았다는 걸 인식했고, 그 사실을 이렇다 할 만족감도 불쾌감도 없이, 그러니까 복도에서 그리 거북하지 않은 이웃과 마주친 듯, 이따금 거울 속의 나와 마주하며 확인했다.


삶이 우리에게 제대로 신호도 보내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갔고, 조용하고 우아하고 부드럽게 카드를 거두고선 우리에게서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 이제야 가까이 들여다보니 우리의 생은 정말이지 길지 않았다.


이쯤 되고 보니 나는 약간 몇 걸음 물러선 채로 뒷짐을 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플로랑, 당신이 원하던 행복한 삶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묻기 위해 몇 발자국 떨어져 본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당신은 지나간 과거의 완벽한 어느 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단 말인가. 당신의 의미 있는 무언가를 알아봐 줄 운명의 카미유 같은 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단 말인가.


그는 지나간 과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난날 일어난 모든 일들은 영원히 일어난 것이고, 이제야 나는 그것을 알았으나, 그것은 닫힌 영원, 닿을 수 없는 영원이었다.


닿을 수 없는 영원에 정말 영원히 갇혀있는 자는 바로 플로랑 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과거의 학창 시절을 영원히 꿈꾸고 있고, 그 학창 시절보다 더 멋진 학창 시절을 보내던 카미유를 잊지 못한다. 과거의 연인을 막연히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다시 만날 운명이라고 꿈을 꾸듯이 말하며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잃게 된 진정한 상실을 앞두고서야 꿈을 찾아 용기를 낸다. 물론 대면한 용기까지는 내지 못하지만, 그것까지도 플로랑에게는 큰 용기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플로랑은 왜 슬픔에 잠식되어 죽어가는 지경에 이르게 된 걸까. 그리고 플로랑과 같은 상황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플로랑이 마음 깊숙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랑하는 과거의 연인 카미유 이후 만났던 연인들을 되짚어보면 그 해답 비슷한 것이 숨어있다. 그는 자신 안에서 보석을 찾아줄 만한 사려 깊고 따뜻한 연인들을 만나려 노력하지 않았다.


[굿라이프]에서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행복한 사람들의 마음보다 행복한 사람들의 일상을 분석해보려는 시도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음식을 먹더라도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애초부터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누구를 만나든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고, 지루한 일도 기쁘게 할 수 있는 비결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즐거운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플로랑은 일에 대한 무력감도 그에게 불행을 보태주는데, 지구 환경에 해악이 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도 우울할 만한 여지를 한 스푼 더 보내주는 것이다. "공장식 축산" 등 인간의 이기심이 담겨있는 구조에 눈을 감고 더 나아가 그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는 과연 꿈꾸던 일을 하는 것일까.


굿라이프에서는 삶의 의미를 행복에 포함하려는 영국의 노력을 언급하며 영국인들의 행복 측정을 위한 4가지 질문을 나열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플로랑에게 내가 묻고 싶었던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가장 주목해야 할 질문은 바로 두 번째 질문이다. "당신이 인생에서 하는 일들이 얼마나 가치 있다고 느끼십니까?" 이 질문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묻는 질문이다.


아쉽게도 플로랑의 질문은 당연히 "No" 일 것이다. 그는 젊은 날의 대부분을 쾌락에 이끌린 채 살았고, 유일하고 진정한 사랑인 카미유를 배신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일과 사랑, 어느 것에도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과거를 끊임없이 복기하고 후회한다. 일에 대해서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그는 그것에서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이가 들수록 더 중요해진다는 뜻이다. 반면 어떤 일을 잘하는 것이 행복에 미치는 힘은 소멸되지는 않지만 대폭 약화된다.

그는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성적 능력을 상실한 뒤에서야 진정한 사랑의 대상을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쾌락으로 상대방과의 연결 고리를 끊임없이 확인했던 젊은 시절의 그는 쾌락이라는 것이 상실된 중년의 삶에서 그 어떤 것과도 연결되지 못한 단절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쾌락의 추구와 고통의 회피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행복이 오히려 간소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행복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로토닌의 어리석고 불쌍한 주인공 플로랑이 하던 선택의 정반대를 하며 살아가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쾌락의 상대가 아닌 진정한 나의 의미를 알아주는 카미유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일에 대하여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찾았다면. 과거의 후회에 얽매여있는 것 보다 지금 순간순간의 선택에 집중하여 지혜롭게 보냈다면.


무엇보다 나의 의미를 나와 연결된, 또는 연결이 끊어져버린 다른 것들에서부터 찾지 않고 내면에 있는 보석부터 알아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지 말이다.


플로랑, 순응하는 대신 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시길. 그렇게 한 걸음씩 해나간다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는 그런 생각들에 반기를 들지 않았고 열렬히 환영하지도 않았다. 다만 거기 순응하며 우리가 무너지게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매우 오래도록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세상의 많은 플로랑들이 삶의 의미를 다시 들여다 볼 용기를 내봤으면 한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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