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길을 내주는 언니

[사랑은 사치일까] 벨 훅스

by ma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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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젊은 여성과 어린 소녀들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먼저 길을 떠난 언니들이 사랑의 비전을 제시할 시간이다.(벨 훅스, 사랑은 사치일까)




오늘의 이야기


며칠 전 지하철에서 나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에게 큰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6년 전 지방에서 서울로 처음 올라왔다. 체력이 넘치다 못해 남아돌 때였고, 서울의 모든 사람들과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아름다워 보일 때였다. 취업 준비를 위해 상경했고 나의 모든 상황이 분명 아름답지 않았지만 나에게 서울을 반드시 정착하고 싶은 곳이었다.


매일같이 스터디 모임을 위해 지하철을 탔다. 그 지하철은 꼭 한강을 지나갔는데, 그때마다 나는 넋을 놓고 창밖을 보았다.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는 탓에 내가 자리에 앉아 맞은편 창을 그렇게 바라볼 때면 그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 민망해할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이런 멋진 곳에서 공부만 하다가 취업도 못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야 한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나는 친구들에게 자주 푸념했다.


다리의 피로감도 느끼지 못했을 그 무렵, 지하철의 자리가 나면 앉고 없으면 가뿐히 서서 갔다. 그때의 나는 내 바로 앞의 자리가 나면 옆의 어르신에게 양보도 해드렸다. 한 번은 내 앞의 자리가 비게 되어 옆에 있는 어르신에게 양보할 때였다. 나는 분명 할머님께 자리를 양보해드렸는데 그 옆에 서 있던 중년의 여성분이 냉큼 자리를 뺐어 앉아버렸다. 그리고는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눈을 꼭 감고 절대 뜨지 않았다.


눈이라도 마주쳐야 나의 실망스러운 눈빛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나의 선의가 항상 좋은 사람에게 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 사람들은 왜 이렇게 빈자리만 보면 못 앉아서 안달일까 궁금했다.


그 후 나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취업을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세상만사 모든 게 귀찮아지기 시작했고. 아침마다 한강이 보이지 않는, 그러니까 냅다 지하로만 달리는 지하철을 타게 되면서 나에게 지하철은 더 이상 아름답고 즐거운 곳이 아니었다.


그 후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지하철은 여전히 어두운 지하로만 달리고 있다.


출근과 퇴근을 모두 만원 지하철로 해야 하는 나는 이제 곧 내릴 것 같은 사람 앞에 선다. 그리고 어떻게든 빈자리가 나면 앉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도 아니면 되도록 앉아있는 사람 바로 앞에 자리를 잡으려도 노력하고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 틈에서 짜증을 냈다가 한숨을 쉬었다가도 한다.


바로 지난달까지의 나는 내 바로 옆을 비집고 자리를 잡으려는 여성분이 있어도 넓게 벌려 균형을 잡고 있는 발을 좁혀주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점점 그녀들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며칠 전 퇴근길, 9호선 급행을 타기 위해 지하철에 올라탔다. 뒤늦게 지하철에 올라타려는 사람들이 마구 밀고 들어왔고, 내 옆의 한 여성분이 잔뜩 긴장한 채로 떠밀려왔다. 뒤쪽에 다른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본인 때문에 누가 못 타는 건 아닐까 등을 구부리고 앞쪽에 바짝 몸을 붙이고 있었다.


슬쩍 눈을 돌려봤다. 지하철 문은 이미 닫혔고 탈 사람은 모두 탔으니 그녀도 이제 구부린 몸을 조금 펴도 될 듯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쳤다. 실수로 누군가의 손이 어깨에 닿았겠지 하는 듯했다. 한참을 돌아보지 않던 그녀의 어깨를 다시 건드려보았다. 그녀가 돌아봤다. 나는 그녀에게 조용히 손짓을 하며 "이쪽으로 조금 더 오셔도 되겠어요."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쓱해했다. 그러고는 조금 걸음을 옮겨왔다. 구부정했던 어깨가 조금 반듯해졌다.


비좁은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간다. 좁지만 나의 자리를 더 내어주고 양발의 폭을 내어준다. 함께 생각하고 길을 내어준다. 앞서 길을 가며 꽃씨를 뿌려준 언니들을 생각한다. 뒤따라가며 꽃을 피해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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