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물이 더더욱 철철 흘러나왔다. 내가 울 거라는 징조를 귀신같이 알아채는 사람. 내가 울면 대부분의 경우 한심하고 귀여워하는 사람. (임경선, 평범한 결혼생활)
오늘의 이야기
남편은 오래된 물건을 잘 활용한다. 나는 연애시절부터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의 친절한 물건 사용법이 참 신기했다. 나는 옷을 사면 몇 번 입지도 못하고 다른 옷에 눈이 가버리고,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고 싫증을 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0살이 훌쩍 넘은 나이 든 차를 꼬박꼬박 '흰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세차를 하고 나서는 '흰둥이 기분 좋아 보이네'했고 가득 주유를 하고 나서는 '흰둥이 배부르겠네' 했다. 스스럼없이 사물을 의인화하는 그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남편의 비현실적인 천진함은 처음 소개팅을 하던 그날부터 알 수 있었는데, 그날 나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뭔가 너무 비현실적인 캐릭터야. 연기하는 게 아닐까 싶기까지 해."
그 밖에도 좋아하는 옷, 좋아하는 물건을 유난스럽게 티 내지는 않지만 먼지를 닦아가며 애정을 묻혀가며 꾸준하고 끈기 있게 사용감을 쌓아가는 그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연애 1년이 다가올 무렵, 나는 이런 꾸준함과 꼼꼼함을 가진 그를 다른 여우 같은 여자들에게 빼앗길까 봐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가볍게 날아다니는 냅킨을 돌로 묵직하게 눌러놓듯이 들쑥날쑥한 나의 감정을 그의 성정이 묵직하게 지켜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에게도 생길 사용감과 노화의 신호도 애정 어린 마음으로 한결같이 지켜봐 줄 것 같다는 희망도 있었다.
그 믿음은 결혼 후 그의 일상을 더 가까이에서 보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감정의 저 아래까지 내려갔을 때 그의 옷자락을 잡고 그를 질질 끌고 내려가려 하면, 그는 기꺼이 나와 함께 내려왔다가 나를 위로 먼저 밀어 올려준다. 이 일련의 메커니즘이 나로 하여금 차분하게 침착하게 행동하는 묵직함을 갖게 했다.
가끔은 '정말 다르다 달라. 정말 서운하다 서운해.'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도 이런 묵직한 꾸준함 덕분에 나의 감정도 평온해지고는 한다. 결혼 후 1년 반이 지나가는 요즘도 가끔 내가 먼저 청혼하고 결혼하자고 난리였던 과거의 내가 민망해지지만, 용기 있는 여자가 멋진 남자를 얻은 업적이라 생각하면 나 자신이 한없이 기특해진다.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뻔하지 않은 결혼에 대한 글이라는 것과 외람된 말씀이지만 작가님 부부 내외가 정말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것 그리고 나도 이렇게 20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간 소식과 함께 작가님께서 하셨던 이런저런 말씀들(결혼을 앞둔 사람들이 읽는다면 말리고 싶다는 뉘앙스의)을 모르는 척 결혼을 앞둔 친구에게 선물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는 그 어떤 신혼일기보다 달달하고 따뜻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취업을 하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말처럼. 나에게도 결혼이란 또 다른 문을 열었던 하나의 시작점이었다.
꼼꼼한 그의 성격 덕분에 나는 몹시 많은 잔소리를 견뎌야 하고, 바로 어제도 오늘도 그의 잔소리에 나는 버럭 화를 내버리고 말았다. 오늘 아침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집이 기숙사인 줄 아는 거 아니지? 내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에휴." 나의 들쑥날쑥한 감정탓에 나의 마음과 일상의 정돈까지 모조리 그가 책임지게 되어버린 것 같아 미안해졌다.
운동을 하고 온 그가 근육통을 호소하자 나는 숙고 끝에 마사지건을 조립했다. 그는 순한 양이 되어 소파에 엎드렸고 순순히 마사지를 받았다. 따뜻한 햇빛에 녹아버린 초콜릿과 같이 말랑해진 그는 졸고 있었다. 나는 족집게를 들고와 그의 머리에서 흰머리를 찾아 자비없이 뽑아내버린다. 그는 여전히 머리를 만져주면 더 깊이 잠에 빠져든다.
아마 20년 후에도 이렇게 흰머리를 모조리 뽑아버리면 남는 머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득한 미래가 갑자기 가깝게 느껴진다. 온통 검은색 뿐인 그의 수염에도 하나 둘 흰 수염이 날텐데. 그와 함께 나도 흰머리가 많아지겠지. 아니면 내 흰머리가 더 많아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의 흰머리는 그에게 맡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멀리 산책을 떠나보기로 했다. 짧은 봄날의 긴 오후다. 우리의 소중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