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귀 소리만으로도 이름을 맞추는 친구들이 있었다. 같은 학과 동기인 희와 솔. 희의 고향 친구에서 우리의 친구가 된 영. 우리 넷은 희의 고시원에 매일같이 모였다. 방귀를 뀌어대며 웃고 울었다. 졸업을 1년 앞두고 있던 때, 영은 이제 아르바이트 말고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자퇴를 했고, 전국에 지점이 있는 카페의 계약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남은 셋은 대학을 마저 다녔고 2~3년 후에 밥벌이를 시작했다. 각자의 시간표대로 돈을 벌고 살아가면서도 성실하게 근황을 나누던 우리였다.
우리 모두 서른이 되었던 그해 3월, 영이 갑자기 단체 대화방에 “고마웠어 내 친구들. 잘 지내!” 하는 말을 남기고 대화방에서 나가버렸다. 셋이서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그녀는 받지 않았다. 희가 영의 동생과 친구들에게 연락한 끝에 당시 영이 만나던 애인의 연락처를 알 수 있었다. 희는 그에게 상황을 알리고 최근 영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울먹이며 최근 영과 헤어지기로 했으며, 그날은 영이 그의 집에서 나가주기로 했던 날이었다고 했다.
우리 셋의 불안한 마음은 더 커졌고, 영의 최근 행동을 곱씹기 시작했다. 영은 나에게 거의 입지 않았던 코트와 새 텀블러를 보내줬다. 희와 솔도 각각 선물이 가득 담긴 소포를 받았다. “집 정리를 하는 중에 너희 생각나서 보냈어.” 하는 말에 전혀 의심하지 못했던 우리였다.
나는 우선 112에 신고를 했고 혹시 모텔 같은 곳에 혼자 들어간 여자가 없었는지 일대를 찾아봐 주실 수 없느냐, 정말 죄송하다고 부탁드린다 했다. 그들은 알겠노라 답했다. 영의 헤어진 애인은 죄책감에 울먹이며 동네를 뒤지고 다녔다. 그는 온 동네를 뒤져봐도 영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생각했다. “네가 영에게 잘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전화를 꽉 쥐고 잠들었던 모양이다. 전화 진동 소리에 잠이 깼다. 다음 날 새벽이었다. 상대방은 본인을 경찰이라고 신분을 밝혔고, 인근 모텔에서 영으로 추정되는 여성을 찾았다고 말했다. 어제 저녁 분명 일대 모텔을 모두 뒤졌는데, 아마 그들이 다녀간 후 입실했던 것 같다고 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여수와 광주에 있는 희와 솔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들은 바로 올라오겠노라 말했다.
나는 영이 옮겨졌다는 장례식장을 향해 출발했다. 안전한 텐트 안에 숨어 있다가 비가 그친 후에야 비로소 바깥으로 나온 듯했다. 지난밤 나는 뛰쳐나가 영을 찾으러 다녀야 한다고,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영을 찾아 낯선 모텔들을 뒤지고 다니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거리를 밤새 뛰어다니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과 영의 애인이었던 사람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 한 걸음 뒤에 빠져있던 내 모습이 징그러워 눈을 질끔 감았다.
병원에 그녀의 가족들보다 먼저 도착했다. 장례식장을 어떤 방으로 잡을까 희와 솔에 전화로 상의했다. 이 일을 다른 대학 친구들에게 알렸고 영정 사진으로 쓸만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장례식장 음식 옵션을 고른 후 친구들에게 전달받은 사진 중 하나를 골라 장례식장 직원에게 보냈다. 시간이 지나고 눈물범벅이 된 영의 엄마 아빠 여동생이 장례식장에 왔다. 영의 친척들도 속속 도착했다. 나는 약국으로 내려가 앰플을 섞어 먹으면 힘이 나는 드링크제를 여러 병 사서 그들에게 내밀었다. 몇 시간 후 희와 솔이 도착했다. 나는 그녀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펑펑 울었다.
우리는 장례비용을 셋이서 부담하기로 했다. 영의 부모님은 신용 불량자라고 들었고, 여동생은 오랫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으니 그 밖에 우리가 영을 잘 배웅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영의 장례 후 몇 달이 지났을 때였다. 영의 여동생과 어머니가 연락을 해왔다. 그들은 사망 보험금 지급 요청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이 우울증으로 병원에 간 적이 있다는 것을 증빙해야 한다고 했고, 지인들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내용의 동의서를 써달라고 했다. 영이 떠나기 얼마 전 대화방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회사 잠깐 쉬어볼까 했는데, 엄마가 허리 수술을 하신다네... 내 팔자가 그렇지 뭐. ㅎㅎ” 우리는 영에게 가족들 상관 말고 네 인생을 살라고 조언했다.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대해 경솔하게 조언하던 우리였다. 우린 오랜 상의 끝에 가족이 내미는 어떤 서류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함께 시간과 이야기를 촘촘히 쌓았던 그 시절 우리 넷을 떠올린다. 자퇴 전, 영은 수업을 마치면 곧바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고, 남은 셋은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 갔다. 우리가 공부를 마치고 고시원으로 돌아와 노닥거리고 있을 때면 영이 꼭 일을 마치고 들렀다. 그녀는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막 지나 ‘폐기’해야 하는 크림빵, 삼각김밥 등을 가져왔다. 그녀가 건넨 봉지를 우리가 신이 나서 구경하고 있을 때면 영은 매번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자기 몫을 기꺼이 우리에게 양보했던 영의 하얀 웃음이 그곳에 있었다.
영이 떠난 후 6년 만에 처음 용기를 내어 묻는다. 그때 내가 너를 찾으러 갔다면, 숨어있던 넌 하얗게 웃으며 내앞에 나타났을까. 지금도 내 곁에서 숨 쉬고 있었을까. 혹시 그날 너는 나를 기다렸을까. 우리를 기다렸을까. 내가 무서운 마음을 꾹 누르고 네 이름을 부르고 다녔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땠을까. 그랬다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