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위대한 비극은 개인보다는 오히려 사회와 관련된 것이다.”(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47쪽)
‘도와주세요.’로 시작하는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 뒤이어 어떤 말이 오고 무슨 감정을 길러내야 지금 나의 상황을 단번에 이해시킬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활자들을 적어 내려갔다가 지우고 고쳐본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나뿐만이 겪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나는 그 편지를 보낼 용기를 낼 수는 있을까.
팀장이 우리 부서로 발령받아온 지난 7월 이후 5개월이 지났다. 그가 내뱉는 폭언과 무시, 불신으로 버무려진 나는 더는 어떻게 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할 의지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요즘 살이 너무 빠지셨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 팀장 밑에서 일하다가 비슷한 일로 휴직까지 했던 선배를 화장실에서 만났다. 나는 “요즘 운동을 다시 시작해서 그런가 봐요.”라고 말하고 걱정하는 듯한 선배의 눈빛을 거두고 급하게 화장실을 벗어났다. 그 이후 선배를 마주칠 때면 억지로 더 밝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벽지 같은 여직원이 되고 싶었다. 사실 처음에는 명예 남성이 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큰 병치레를 한 후라 술자리에 참여하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남성성을 억지로 끌어내며 괄괄하게 폭탄주를 말던 때처럼 남자인 척은 하지 못하지만 남초 회사에서 여자인 티는 내지 말자는 것이 내가 대안으로 마련한 생존 방식이었다. 여직원이라는 것을 최대한 감추고 예민하지 않은 척, 모두 다 괜찮은 척 지내는 벽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답지 않은 “OO 씨 집에 밥하러 일찍 안 가도 되?” 하는 이야기도, “요즘 부쩍 살이 쪘네” 하는 말도 하하 웃으며 시원하게 넘겼다. 다행히도 책을 읽고 쓰며 뒷말을 글로 풀어낼 수 있었고. 이 또한 글감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쓰면서 마음을 풀어냈다고 생각해왔다.
지난 7월에 새로 발령받아온 팀장이 오기 전까지 나의 자력으로 세상에 마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당시 내가 담당하던 현장에서 큰 현안 사항이 발생했고, 전임 팀장님과 부서장님이 모두 우리 부서에 계실 때 몇 가지 구두 보고로 정리된 건이 있었다. 모두 시공사의 공사비 증액 요청 건이었고, 미리 보고한 후 결정이 되었던 상황이라 금액 정리를 하던 중에 팀장님과 부서장님이 모두 다른 부서로 발령받아 떠나버리셨던 게 화근이었다. 결재가 남은 상황에서 담당자인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전임 팀장님과 새로 오신 팀장님이 오랫동안 함께 근무하셨던 사이라 하셨고, 그 때문에 현안에 대해 잘 처리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신임 팀장은 막상 본인이 결재하려고 하니 고민할 것이 많으신지 하나부터 열까지 의사결정에 대한 상황을 캐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난 7월 질책과 질타와 짜증 그리고 화가 나를 향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나를 자리에 불러놓고 1시간, 오후에 불러놓고 1시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질책을 늘어놓았고 나는 감사장에 불려온 수검자처럼 답변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결재라인에 본인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니 당연한 절차라 생각했는데. 한 달, 두 달이 지나며 매일 같이 한 건으로 화를 내고 추가 자료를 작성시키고 또 화를 내는 팀장의 모습에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죽고 싶었고 차가 내 앞을 지나면 나 좀 치고 가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무실은 내 기준으로 선후배가 각각 절반쯤 차지하고 있는데. 하루는 후배가 차 한잔을 하자며 나를 옥상으로 데리고 가서 괜찮으시냐고 모두 걱정이 많으시다고. 선배님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통에 눈물을 참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후배들이 듣는 와중에 온갖 무시의 말들을 듣고 있어야 하는 나의 처지가 비참했다.
팀장이 화를 내는 패턴은 거의 다음과 같았다. “이건 왜 이렇게 결정했었지?” 묻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 “OO 씨는 이게 맞다고 생각하나? 왜 일 처리를 이렇게 하지? 팀장 과장 놈들이 이렇게 알려줬나?” 하고 이전 상사들을 싸잡아 욕하기 시작했다. 욕을 다 들은 후 당시의 상황을 추가로 설명하려 하면 10년 차 경력직인 나에게 “이번 일이 처음 하는 사업이냐”며 “의사결정에 왜 이렇게 미숙하냐”는 질책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일의 방식을 이야기하고 나의 의견을 묻고 나는 의견을 말하고 그는 다시 나의 의견을 바탕으로 나를 비판했다. 그렇게 최소 30분에서 1시간의 질타를 마치면 나에게 추가 자료를 만들어 오거나, 다른 방향의 추가 검토를 제시했고 나는 다시 요청한 내용을 해내기 위해 하루 이상을 써야 했다. 나중에는 이걸 다시 가져가면 뭐라고 욕을 먹어야 할까 무서워하느라 업무의 진척이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일같이 욕을 먹으니 팀장이 내 이름만 불러도 무섭고 밥 먹는 자리에서 농담하면 소름이 끼치기까지 했다. 매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사람을 무서워하고 싫어하기까지 하니 내가 자신을 태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만 보내는 동안 시공사는 결정 지연으로 나를 압박해왔고, 이러다가 공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팀장이 나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을까 하며 내내 마음이 끔찍했다.
그러던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미뤄져 있던 결정 건을 하나둘 다시 팀장에게 가지고 갔다. 그는 아무리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그 이후 한 달 동안 서류 작업을 매일같이 수정시켰고, 설계사를 불러와라, 감리를 불러오라 하며 다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지난달, 나는 드디어 팀장의 결재를 받았고 부서장에게 설명하게 되었다. 부서장이 몇 가지 의문을 제시했으나 답변을 한 후 결재를 받을 수 있었다. 드디어 일 하나를 털어냈다는 기쁨에 서류를 스캔해서 문서철에 올리고 있는데. 퇴근하려던 팀장이 나에게 내일 다시 이 건을 검토해보자고 했다. 부서장이 질의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고, 부서장이 보기에 본인이 허술하게 검토한 것처럼 보일까 걱정하는 것이 나에게 보인 이유였다.
그 후 2주가 다시 지났고 3번의 서류 수정과 그보다 많은 내용 확인 지시가 내려졌다. 그리고 지난주가 되었고, 나는 다시 팀장의 자리에 불려가 1시간을 질타와 화를 받아내야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것인가’하는 생각했다. 5개월 동안 열심히 달려오다가 도착점이 저 앞에 보였는데, 누군가가 나의 머리를 잡고 다시 출발점으로 데려다 놓은 듯했다. 이건 꿈이야. 믿고 싶지 않았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잠시 오만함에 취해있었던 것 같다. 화장실에서 나를 걱정해주었던 그 선배가 팀장에게 잘 맞춰주질 못했던 탓에 둘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나는 위기를 잘 극복한 후 아무 문제 없이 팀장과의 화합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던 것이었다. 비겁하게도 최근 팀장의 폭언이 다시 시작되고 나는 이런 생각부터 했다. ‘그래도 그 선배가 인사과에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나중에 팀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도 이상한 사람은 되지 않겠구나.’
나는 아무 문제 없이, 불평 없이, 마찰 없이 잘 지내는 사람입니다. 하며 모든 상황을 묵묵히 참기만 하면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니 손가락질받고 욕을 먹으면서까지 먼저 문제를 제기한 선배가 나보다 수백 배 더 강하고 용감했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과거의 선배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벽지같이 성별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고 평평하게 튀지 않고 하라는 데로 다 하면, 그렇게 나처럼 몇 개월만 하셨으면 아무 문제 없으셨을 텐데. 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선배를 탓했던 나의 숨은 마음이 부끄러워 숨고 싶어진다.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을 하면 우습게도 그 운동을 반대하던 사람들의 자녀들도 혜택을 보게 된다.” 글쓰기 수업 시간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작은 시도가 긴 시간을 돌아 팀장의 자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시간을 훌쩍 지난 후 늦게나마 그가 깨닫게 될지 영영 모른 채로 살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얼굴 모르는 많은 후배를 위해 흐름을 바꾸고 물꼬를 터야 할 것이다. 화장실에서 만날지 모르는 또 다른 눈빛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도와주세요’라고 쓰일 또 다른 편지들에 ‘당신이 느끼는 그 감정은 당신만의 것이 아닙니다.’라고 답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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