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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Dec 08. 2021

잠뜻. 시로 울고 소설로 잠들기

신용목 시인의 <재>를 읽고



한겨울이었다. 사각거리는 이불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9살의 내가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골라준 내복을 입고 있었는데 팔꿈치와 무릎이 닳아 솜이 드러나있었다. 진한 분홍의 원래 색이 다 빠져버린 연분홍의 그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었다.


나는 이불을 비집고 들어가기 전 차가운 겨울 이불 위에 누워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 위에서 팔다리를 가위처럼 벌렸다 좁혔다 하며 시원한 이불의 촉감을 발과 손으로 더듬었다. 발을 까딱거려보기도 고, 누운 채로 양발을 벽에 올려보기도 했다. 발꿈치와 발가락에 와닿는 벽지의 촉감이 이불의 버석거림과 닮아있었다.


신용목 시인의 소설 <재>를 읽고 아직 9년밖에 살지 못했던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생각은 하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리던 그때의 내가 했던 생각들. 이불 겉의 감촉과 벽의 질감을 느끼던 시간. 다급하게 잠뜻으로 향하던 길.


할머니는 내가 밤새 온 방을 굴러다닌다고 했다. 한방에서 함께 자는 언니들까지 발로 차고 다닌다고, 할머니는 그런 나를 잡으러 다니느라 깊은 잠을 들지 못한다고 했다. 할머니는 나를 벽과 당신 사이로 눕혀 재우기 시작했고 나는 그 후 대학생이 되어 따로 방을 쓰게 될 때까지 그곳에서 잠들고 깼다.  


"니는 잠뜻이 심해야." 할머니는 잠꼬대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심한 잠뜻으로 할머니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 지에 달라붙어 잠을 자려 노력했다. 나중에는 잠들기 전 이마에 닿는 시원한 벽의 온도가 나를 재워줬다.


다음날 눈을 뜨면 틀림없이 벽에 이마를 붙인 채로 잠에서 깨던 나는 어제저녁도 발을 굴렀다는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갸우뚱했다. 어제의 잠이 먼 미래의 인 것 같이 느껴져 이상했다.


꾼 적 없는 꿈속에 갇힌 듯했다. 


그 무렵의 나는 잠뜻과 현실의 경계를 자주 옮겨 다녔다. 잠들기 전 할머니가 이부자리를 펴주고 화장실에 소변 누러  사이 내가 서걱거리는 이불 위에 누워있던 것인데.


벽지에 발을 올리고 벽을 타고 올라간 천장을 보고 있으면 어김없이 '여기가 어디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나는 누구지' 하고 다시 묻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아 이불 위의 차가움이 무서워졌다. 천장에서 시선을 돌리고 이불 안으로 숨어들면 될 텐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할머니가 볼일을 보고 화장실 문을 닫는 소리가 나면 일순간 모든 것이 깨어졌다. 나는 따뜻한 이불 안으로 냉큼 들어가 눈을 감고 잠뜻을 하러 길을 떠났.


아홉 살의 나에게 드는 이상한 궁금증이 무서워 털어놓을 자신이 없었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시인이 "시의 마음을 담보로 소설의 몸을 빌렸"다고 한 이 이야기가 나의 아홉 살을 떠올리게 한 이유를 나는 모른다.


다만 소설 속의 '나'를 둘러싼 이야기들과 의 내면에 자리한 이야기를 부족함 없이 들었기에 확실하게 슬퍼졌을 뿐이다. 화자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지난 일을 나에게만 들려주었기에 나 또한 그에게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일까 가늠해본다. 


그리고 저만치 밀어두었던 이상한 아홉 살의 나를, 벽을 바라보고 잠뜻을 누르려 애썼던 나를 떠올린다.


너무 멀어 감히 그게 나였는지 생각할 엄두도 나지 않는 그때의 나는 정말 있었을까. 내가 잠뜻을 하며 달리던 그곳은  정말 있었을까.


시인의 소설을 읽고 지금의 나는 먼 과거의 나와 그보다 더 먼 미래의 나를 동시에 마주하는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변해갈 것이고 우리의 시간도 달라지겠지"만 분명 나는 그곳에 있었다.


모와 현, 섭과 수의 이야기 가운데 놓인 화자가 갈지자를 그리며 얼기설기 온몸으로 엮어가는 이야기를 눈만 따라 쉽게 읽어버린 내가 금방 미안해졌다.


함께 발을 동동 구르고 잠뜻을 향해 내달리다가는 미리 꾼 꿈인지 이미 꾼 꿈인지 몰라 갸우뚱하고 싶다.


"대지를 잃어버린" 화자의 등을 두드려 재워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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